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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야 Mar 23. 2020

영화 <작은 빛>

역동성은 보편적 공감에서만 기인하는가. 

<작은 빛>

2020, 조민재 감독




 분명 올해 한국 영화의 놀라운 발견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 자체가 갖는 힘도 힘이지만, 이 작품을 배급한 영화사를 보더라도 그 안목과 결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물론 이런 언급을 앞서 하는 이유는 <작은 빛>이 흔히 말하는 ‘다양성 영화’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는 영화일 뿐만 아니라 같은 입장을 갖는 영화들 사이에서도 좀 더 정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다큐멘터리의 인장이 느껴질 정도이니, 큰 관객수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보편에 기대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정형석 감독의 <성혜의 나라>(2020)를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 역시 이야기 속에서 인물의 갈등을 계속 따라갈 수밖에 없으나, 그 거리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감정보다는 상황을 통해 인물의 변화와 메시지를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이 역시 현재 취업 문제와 같은 '사회적 문제'라는 보편에 적잖은 의지를 하고 있다. 당연히 이것이 안일한 방식이라는 것이 아니다. 반면 <작은 빛>이라는 작품은 힘을 조금씩 분배할 수 있는, 그렇다고 너무 간편하다고 비판받는 것도 아닌 이러한 방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물론 영화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각본을 직접 작업한 조민재 감독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다. 덕분에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의 영화가 말하는 일종의 사회적 갈등과 같은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자칫 잘못하면 일종의 푸념이나 설득력 부족한 자의식 과잉과 같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상당한 수의 단편작들이나 독립장편작에서 이러한 모습을 많이 보아왔지 않은가. 그러나 이 영화는 철저하게 개인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어내면서도 카메라는, 다시 말해 감독은 캐릭터들과의 거리를 끊임없이 유지한다. 이것은 일종의 결단이자 용기처럼 보이는데, 덕분에 우리는 보편에 의지하지 않은 개인의 이야기를 좀 더 객관적인 시선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 누구나 본인의 이야기를 쓸 수 있다. 본인의 이야기이고 본인의 갈등이자 그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영상으로 옮긴다면 자연스럽게 카메라는 본인(또는 본인의 역할을 하는 배우에게)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이야기 속에서 각 상황에 맞는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푸념이자 자의식 과잉이 될 위험이 크다. 그토록 개인적인 순간을 담은 작품이 어떻게 많은 관객들을 쉽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이는 결국 창작자의 머릿속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창작 과정을 거치며 ‘해야 할 이야기’로 탈바꿈하며 일종의 딜레마에 빠지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작품이 다른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힘을 갖는 경우를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작은 빛>의 태도는 이와 상당히 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이 작품 속 카메라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고정된 카메라의 시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진무(곽진무)를 포함한 인물들이 진무의 카메라로 누군가를 찍는 시선이다. 전자의 경우는 일반적인 카메라의 방식이자 감독의 시선이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 속 인물들과 이들을 찍는 카메라는 계속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찍고 있는 감독은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임에도 관여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판단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과거 자신의 모습을 직접 관객의 자리에서 보며 스스로 무언가를 알아보려는 시도로도 보인다.


 이는 분명 영화적으로 흔치 않은 광경이다. 자신의 과거 경험에 대한 질문을 영화로 던지고 그것에 대한 답을 영화를 찍으며 알아보려 시도, 이것은 감독 조민재가 영화 자체를 어떤 태도로 대하는 것인지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흔들리며 인물들에게 다가가는 카메라가 존재한다. 이것은 바로 등장인물들이 진무의 카메라로 찍는 행위인데, 흥미롭게도 일정한 거리에서 찍는 고정된 카메라와 비슷한 거리와 시선으로 진무의 카메라가 작동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사실 이렇게 이어지는 것은 같은 장소와 같은 인물들의 시퀀스이기에 당연한 방식이지만, 고정된 시선을 통해 캐릭터들의 감정마저 통제되듯 진행하다 어느 순간 진무의 카메라로 시선이 옮겨지는 순간, 마치 같은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듯한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기술적인 효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흔들리는 시선은 실제 진무의 카메라를 든 누군가가 직접 그 상황 속 인물을 찍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감독의 시선이 아닌, 사실적인 캐릭터 그 자체의 시선이 된다. 그렇기에 진무의 카메라를 든 인물과 그 화면 안에 담기는 인물은 같은 공간 안에서 기억 속의(정확히는 감독 조민재의 기억 속의) 일부가 아닌 독립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물론 이것은 말한 것처럼 기술적인 효과로만 보일 가능성 역시 다분하다. 시작부터 고정된 카메라의 시선을 고수했으니 중간중간에 스며든, 그것도 선명도마저 차이가 나는 화면이기에 뻔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무의 카메라는 이러한 기술적인 차이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것이 중단되고, 영화는 미라가 된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진무의 뒷모습과 함께 아버지의 과거 사진들을 진무의 카메라가 찍는 장면이 이어진다. 마치 집착하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온 고정된 샷들은 감독이 관여하지 않으려는 기억이며, 어쩌면 사실상 사진에 가깝다. 단편적인 기억 속 상황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모습을, 그 사진들을 움직이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담으면 어떻게 되는가. 영화는 고정 샷과 핸드 헬드 샷의 경계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도록 보여주어 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억의 시선과 그 기억 속 인물을 주체로 만드는 시선을 하나의 시선으로 만들어내며 그 경계를 허문다. 그리고 그 인물은 죽은 아버지이다.


 그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기억에 대한 판단을 경계하고, 그 상황을 직접 마주하고 표현하는 배우이자 캐릭터들이 각각의 주체가 되는 방식을 통해, 이 ‘기억’이라는 영화를 원했던 그는 결국 죽은 아버지마저도 영화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인물로 만들어내며, 영화적인 역동성과 함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어떤 의문에 대한 해답으로 다가간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우리는 늘 해답을 찾는 방향과 지점을 늘 정면으로 보이는 하나의 빛으로 여기고 애써 그곳으로 다가가려 애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마지막은 빛을 따라가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다.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의지의 시작은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는 것처럼, 본인의 기억 속 감정에서 빠져나와 그것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과 같고,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은 해답으로 보이는 저 멀리 있는 작은 빛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밝은 곳에서 기억 속 누군가와 함께 그 답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라는 예술의 시작부터 함께한 그 ‘빛’을 발산하는 듯한 이 작품과 함께, 어쩌면 우리는 또 하나의 해답, 또는 또 하나의 질문을 마주하게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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