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야 Mar 30. 2020

단편 영화 <종말의 주행자>

결국 보여주고 말겠다는 의지, 영화에 대한 이토록 절실한 찬사.

<종말의 주행자>

2018, 조현민 감독


*이 작품은 현재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플레인 아카이브'라는 블루레이 전문 사이트에서 판매하는 <서울독립영화제 2018 베스트 컬렉션 블루레이>라는 제목의 블루레이에 수록되어 있어, 이를 구매하여 관람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 사이트 역시 저와는 관련이 없으며, 좋은 작품을 보는 방법을 미리 알려드리는 취지로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여러 종류와 다양한 형식의 코미디 영화가 있을 것이다. 시각 위주의 코미디인 ‘슬랩스틱’이 있을 것이고, 상황에 맞는 대사를 사용하는 유머들도 수없이 존재하며, 풍자와 해학의 ‘블랙 코미디’ 형식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반드시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그 효과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넘어지는 인물을 보여주거나 유머러스한 대사를 들려주는 경우, 스크린이 아닌 다른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도 그 유효함이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종말의 주행자>의 코미디가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 중 하나는 영화 안에서 다뤄져야만 그 유머의 힘이 훨씬 더 효과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에 있다.


 어떠한 코미디 영화는 관객들이 예상하는 방식을 차단하거나 역이용함으로써 메시지 등 의도한 결과를 얻어내는 그 방식을 사용한다. ‘영화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이야기 속 상황들을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미리 언급한 뒤,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것이 부합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방식과 내면이 스스로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게 하거나 칭찬을 하는 방식을 보며 <종말의 주행자> 역시 위와 같은 방식을 코미디의 도구로 십분 활용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주인공인 ‘박동식’(서현우)의 직업이 영화 평론가인 것까지 생각하면, 이 작품 속 코미디 요소들은 분명 영화라는 장르이기에 가중되는 관객의 웃음에 타당성을 제공한다.(‘박동식’이라는 주인공의 이름 역시 유명한 두 ‘영화평론가’의 이름을 조합하여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가치를 가중시키는 것은 이러한 방식의 유머만은 아닐 것이다.



 후반부에서 관객은 ‘동식’과 ‘은수’(최서연)가 동행하던 장소들이 전부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동식이 듣는 내면의 목소리와 코믹한 상황들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납득하게 만든다. 그리고 꿈으로 표현된 전반부의 것들이 상처 입은 주인공이 구축한 일종의 방어기제임을 드러내며 웃음을 선사하면서도 흥미로운 부분들과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기본적으로 <종말의 주행자>는 (적어도 꿈의 상황들에서)로드무비이자 성장영화의 틀을 가지고 있다. 특히 동식을 죽이려는 ‘박두철’감독(남문철)에게서 위기를 모면한 후 수직 수평적인 이미지들이 배치된 것과, 위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감을 직접적인 대사들을 이용해 관객에게 표현하는 것을 통해 좀 더 전진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 방식을 통해 동식이 ‘철학자 왕’을 찾아가는 행동에 박차를 가하면서, 결국 영화가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에 대한 궁금증마저 증폭시킨다.


 장르 영화의 방식도 엿볼 수 있는 이유는 악당에게 복수하려는 주인공이 내적갈등을 겪으며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동식은 영화를 해석하는 것과 하지 않으려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통받는 인물인데, 은수와 만난 후 모닥불을 피워 놓고 하는 그의 대사 “네가 했던 그 모든 말들이 다 허망하고 무의미하다는 거지”를 포함한, 부정적인 대사들을 통해 그가 과거에 ‘해석하는 행위’에 의해 불행을 겪었음을 초반부터 짐작해 볼 수 있다. 어떤 영화들을 해석하고 평론하는 것에 흥미를 가져본 관객들이라면 한 번 정도는 경험했을 무기력함을 공감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해석을 하는 행위에 있어서 동식이 취하는 회의적인 태도에 최소한의 납득을 제공한다. 또한 영화를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즐기라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듯한 동식의 대사들을 보면, 어쩌면 영화를 해석하는 행위 안에서 뜻하지 않은 순간들을 마주해본 관객들의 심정을 동식이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혼란의 상황 속에서 은수라는 인물은 어떤 존재일까. 그녀는 기본적으로 동식이 꿈속에서 만들어낸 인물이며, 동식이 살아오면서 직접 이름을 들어보거나 실제로 본 적이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은수는 동식에게 어떤 존재일까.


 꿈속에서 동식이 박두철 감독을 만나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 은수 덕분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박두철 감독의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을 열거했는데, 이 설득의 말들은 이전에 동식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했던 ‘해석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유머 코드로 사용되었던 이 행동들이 실제로 누군가의 작품에 좋은 결과로 귀결됨을 보여주며, 그 몸짓들이 결코 웃음거리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것과 “내가 찍고 있는 동안 아저씨는 정상인 거예요”라는 대사로 추측하자면, 은수는 병적으로 해석하려는 동식의 행동을 지지한 그의 아내로도 보인다. 물론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동식의 아내도 사고가 나기 전까지 그를 계속 카메라로 찍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좀 더 흥미로운 지점은 동식이 병원에서 깨어난 뒤 만난 의사(정인겸)의 질문인 “정은수는 누구인가요?”와 함께 드러난다. 이것에 대한 내용은 여러 장면들 속 요소들을 견주어 보며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위기에 빠진 동식을 구해준 것은 분명 은수였다. 말했듯이 박두철을 설득해낸 은수의 말들은 모두 동식에게 빚지고 있다. 또 한 번 이 작품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처럼 볼 수 있는 이유는, 어떤 영화가 동식으로부터 나온 평론에 의해 난도질당하는 영화가 될 수 있고, 반대로 그 작품의 창작자가 눈물을 보이며 감사의 말을 전할 정도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누가 그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영화가 달라지는 것이며, 작품을 기억도 못하면서 해석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의미 없는 행위임을 꼬집는 듯 보인다. 게다가 동식은 현실마저 영화처럼 해석해버리는 상황까지 마주하게 된 탓에 아내를 잃었으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보여주는 폭발의 이미지와 해골을 사용한 죽음의 이미지는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과감하게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동식을 결국 갈망하던 비를 맞게 된다. 그리고 복수하려 했던 철학자 왕을 만나게 되고, 영화의 해석을 기반으로 한 검투에서 승리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영화를 해석하는 행위 자체를 풍자하고 있지만, 그 해석의 행위 또한 영화가 안고 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 작품은 호의적인 뉘앙스를 펼쳐 보인다. 또한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이 목격한 바다에, 수직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송전탑을 삽입하며 영화와 평론에 있어서 이 작품이 긍정적인 결론에 닿았음을 보여준다.



 이제 영화를 해석하는 행위에 대한 이 작품의 태도와 등장인물인 은수를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차례이다. 은수는 동식에게 있어서 아내를 대신하는 인물이면서도 영화의 종반부까지 등장하기에 굉장히 중요한 존재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은수는 누구냐’는 의사의 물음에 동식은 허구의 인물임을 고백한다. 그다음 질문, “왜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냈죠?”. 대답, “영화는 1초에 24장의 연속된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거죠. 한 번 사라진 프레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는 대답이 아닐뿐더러 동문서답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대답을, 우리는 역으로 이용해볼 필요가 있다. 동식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아내의 죽음일 것이다. 현실과 영화를 혼동하여 그녀를 죽음에 닿게 했으니. 그렇다면 그 앞뒤의 문장은 어떤 의미일까. 따로 두 문장만 본다면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다.


 은수가 동식이 만들어낸 아내이자 사라지는 프레임을 막기 위한 그의 해결책이라면, ‘영화’와 동식의 ‘아내’가 공유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영화 때문에 죽게 된 동식의 아내가 있다. 그 영화의 해석을 증오하여,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철학자 왕’으로 하여금 영화를 없애려는 동식이 있다. 그리고 영화와 아내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는 동식의 무의식이 존재한다.


 이제 의사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자


 “왜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 낸 거죠?”


 ‘영화’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죽은 아내가 어떤 존재이기에 허구의 인물을 만들면서까지 되살리려 했던 거죠?”


 좀 더 타당하게 수정해보자.


 “죽어가는 영화가 뭐기에 그렇게 되살리려 했던 거죠?”


 결국 동식에게 영화는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에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도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아내처럼 영화도 죽게 놔둘 수 없다. 그러니 그는 정상인 것이다.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는 것. 그것은 현실에서도 잊을 수 없는 존재이며, 자신의 해석과 평론에 의해 죽음에 다가서는 영화를 위해, 직접 ‘철학자 왕’을 만들어 영화에 흠집을 내는 자신과 싸우려는 내면의 갈등 단계까지 이른 상황이다. 그리고 관객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보이는 동식 역시 영화 속에서 우리에게 말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은 늘 ‘정상’인 것이라고.



 마침내 갈망하던 비를 맞게 된 동식은 그의 오른쪽(자연스러운 이미지)에 위치한 창문을 바라본다. 카메라의 화면 속에서 창문은 영화의 스크린으로 바뀌며, 동식은 사라져버린 은수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된다. 자연스러운 그 방향으로 그는 주저 않고 카메라를 들고 달려간다. 은수와 함께 영화와 비슷한 뭔가를 만들기 위하여. 그리고 영화가 다시 시작했다. 1초에 24프레임씩 다시 작동한다. 인물들이 움직이고 말을 한다. 누군가 영화를 보고 있다면 영화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뭔가’이기에.


 영화의 시작에서 해골부터 출발한 그의 해석은 망자의 반지를 ‘두 세계를 나누는 경계’로 표현한다. 마치 영화의 스크린처럼 인식되는 그 반지의 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동식뿐만 아닌 관객 모두일 것이다. 동식은 다시 만난 은수의 뒷모습을 그 경계를 통해 바라본다. 사라진 프레임의 남긴 흔적을 다음 프레임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손으로 가릴 정도로 눈부신 노을(영화)을 바라보다가, 문득 끼고 있던 반지(스크린)를 발견하는 것처럼, 온 세상이 아름다운 영화들로 가득 차 있음을, 어쩌면 우린 이렇게 우연히 한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에 대한 이토록 절실한 찬사를, 과연 어떤 단편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영화 <작은 빛>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