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가 우리의 건강, 즉 생명과도 연관된 존재가 되고, 존재감 없는 ‘먼지’라는 단어의 의미가 확장되며 하나의 이야기의 중심이 될 힘을 갖게 됐다. 그렇기에 미세먼지가 세상을 덮는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흐름이다. 그리고 <우주인 조안>은 이 배경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가장 큰 배경이 되는 설정이 잘못된 경우는 거의 없다. 2046년이라는 시기나 그때의 지구의 모습, 아니 적어도 한국의 모습이 미세먼지로 가득한 디스토피아가 된다는 설정을 통해, 관객의 입에서 무기력한 한숨부터 나오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물론 26년 뒤가 ‘C와 N’이라는 하나의 세계관이 설정될 만큼의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겠지만.) 그런데 설정이 낳는 또 다른 설정에서 모순이 생긴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SF8’이라는, 이 작품이 속한 프로젝트의 방향에 따라 미래 세계에서 현실의 문제를 얘기해 보는 것이 핵심이 될 텐데, <우주인 조안>에서의 문제 제기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차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힘을 얻기 위해, 중심인물은 자신이 ‘C’인줄 알고 살아온 ‘N’인 이오(최성은)가 된다.
출처 - wavve
언급한 것처럼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한 가장 큰 설정에서부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설정은 내용의 진행만을 위해 너무 단순하게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N인 조안(김보라)과 이오가 같은 수업을 듣냐던가, 항체 하나로 70년이라는 수명의 차이가 생기냐는 확률적이거나 과학적인 근거로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작품이 선택한 ‘차별’이라는 전제가 이 작품의 여러 측면에서 모순을 보여주며 몰입감을 줄이고 긴장감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가진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그 설정에 작품 스스로 너무 영향을 받은 나머지 시각적으로 종말의 모습을 더 심화시켜 설득력 부족한 장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경(윤정훈) 모친의 장례식이 바로 그 예시에 해당한다. 장례식과 그 마지막 모습에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지만, 차별이라는 설정을 좀 더 효과적이고 빠르게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이 선택한 것은 앙상한 가지들만 남은 나무들이 즐비한 숲속이라는 것에는 분명 문제가 존재한다. 차별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겪어왔을 N집단의 경우, 그들이 가진 문제는 항체가 없을 뿐이라는 것인데, 이 장면 속 시각적인 상황을 통해 오히려 그 문제를 일종의 전염병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C집단이 아닌, 이야기 스스로인 것 같다. 다른 것도 아닌 환경적 요인에 의한 결과가 낳은 한 생명의 죽음이 이렇게까지 내몰리게 될 수 있을까. 게다가 장례를 치르는 이들이 있는 장소가 숲속이라는 이유 역시 어떠한 방식에서도 언급이 없다.('N타운'이라는 공간으로 설명을 대신하기에는 죽음은 상대적으로 돌출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N이라는 집단은 정말 이처럼 무기력하게 가족의 죽음을 끝마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무기력함은 왜 긍정적인 예술의 결과를 만드는 방식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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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장면에서 또 하나의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장례식의 복장이다. 의술의 발전에 따라 죽음은 '자연의 순리'에서, '질병과의 패배'로 이어진 결과로서 자리잡아 왔다. 그리고 이때 패배의 원인 중 하나는 청결과 반대된 요인들일 것이며, 그렇기에 시간이 갈수록 이장(移葬)과 같은 상황이 아닌 이상, 한 사람의 죽음을 정리하는 모습은 최소한의 청결한 방식을 추구할 텐데, 작품 속에서 장례 장소를 포함해 인물들의 복장은 그것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굳이 이렇게까지 종말의 모습을 띨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게다가 경의 직업이 의사라는 점과 이 디스토피아의 문제가 미세먼지라는 점에서 이야기적인 아이러니 함이 아닌, 설정 자체의 문제가 되는 아이러니함이 발생하며 몰입도를 저하시킨다.
또 다른 문제로 삼게 되는 것은 ‘N타운’이라는 장소이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관에서 N이라는 한 알파벳은 일종의 ‘혐오 표시’까지 함의하고 있다.(그리고 그 행위의 주체는 C집단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런데 그것을 구어적 방식이 아닌, 지명에 대한 고유명사로서 표시했을 때, 그 장소에 거주하는 이들의 방식이 밝고 진취적이라는 것에는 다소 모순이 발생한다. 만약 그러한 아이러니에서 오는 이질감을 연료 삼아 이끌어 간다는 의도였다면, 이는 주인공을 제외한 인물들을 오직 기능적으로만 사용할 뿐이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렇기에 N집단을 좀 더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가이드 소년 역시 C집단에 대한 어떤 분노도 없이(그것으로 인한 갈등을 전혀 만들지도 않고) 기능적으로 설명만 하며 사라지는 자리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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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것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 작품에 존재하는 흥미로운 연출들이 이야기를 좀 더 진정성 있게 만드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차 밖의 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한 한낮의 모습이다. 그리고 조수석에는 괴로워하며 수트를 입고 있는 이오가 앉아있다. 그런데 경찰에 의해 차가 멈추며 외부의 진짜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시각적으로 흥미로움을 드러낼 뿐 아니라, 경 모친 장례식 후 이오가 운전하는 차 밖의 풍경의 모습과 비교해 이오의 엄마를 자신의 공간(C집단의 공간) 안에서 다른 공간(N집단의 공간)을 애써 무시하려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그러한 차단의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 이오는, 차 밖의 풍경으로 보이는 네온사인을 포함한 불빛들을 보는 인물로서, 절망 사이에서 희망을 보려는 의지를 가진 인물로 표현된다. 또한 직접 운전하는 조안은 이오와 똑같이 절망적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뿐 아니라 직접 방향성을 갖고 움직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같은 움직임에도 어떤 변화를 통해 인물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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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오와 조안이 내리는 비를 함께 맞는 순간은 독립적으로 본다면 낯간지러운 장면이 될 가능성이 클 수 있지만, 직전에 피아니스트인 조안 언니의 음악을 이오의 엄마가 좋아한다는 사실과 조안의 노래를 듣는 이오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배경이 다른 두 인물이 같은 위치에서 공감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해내는 장면이 된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천문대에서 서로의 맥박을 느끼는 장면은 온기가 사라진 세계 속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된다. 또한 이 장소에서 조안이 이오의 이름의 의미를 알려주는 장면 역시 차별과 계층적인 사회적 문제를 넘어서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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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인 조안>은 장단점이 명확한 작품으로 보인다. 그런데 단점이라 생각되는 부분이 전반부에 여실히 드러나며 이야기의 몰입도를 방해하고 후반 부분까지 영향을 미쳐 아쉬운 느낌을 받게 된다. SF장르의 이야기들이 한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사실이지만, 그 설정에 있어서 익숙해져야 할 많은 중요한 조건들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