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영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어느 끝에서 잠시 마주하는 침묵과 단절
2021, 권민표, 서한솔 감독
실재 중고등학생들이 주연 배우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우리가 기대하거나 우려하는 것들 중 하나는 그들의 연기일 것이다. 다시 말해 성인 배우들에 비해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이 화면 안에서 어색함 없이 조화를 이루는지 아닌지가 중요할 텐데, <종착역>에서 마주하는 배우들의 모습에서는 그런 돌출적인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각본을 기반으로 한 명확한 대사를 따로 두고 있지 않아서 가능한 것처럼 보이며, 연출적인 선택과 배우에게 편안한 촬영 방식(‘롱 테이크’ 등) 또한 그 기반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연기적 측면의 장점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 사이에 큰 갈등이 없어서 발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종착역>의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인물 간의 갈등이 아니라, 인물과 환경 사이의 갈등일 것이고, 이 역시 심각하지 않아 연기의 틈을 만들어낼 가능성 역시 적다. 게다가 작품 자체가 집중하는 것은 네 여학생의 대화와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풍경 그리고 그 장소의 이동으로 보인다. 덕분에 관객으로 하여금 향수에 젖는 순간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그 대화의 밀도 역시 과거의 그것과 같아 깊이 있는 시각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종착역>에서 네 명의 학생들이 향하는 곳은 단지 대화와 소통을 위한 공간일 뿐이었을까.
마지막 장면과 질문들
종착역은 네 명의 학생들이 ‘세상의 끝’을 찾으러 가는 내용이다. 이는 1호선의 끝인 ‘신창역’에서 철로의 끝이 있는 또 다른 역, 그리고 도시와 대조되는 풍경들을 지나 한 경로당에서 마무리된다. 다시 말해 ‘끝’이라고 생각한 공간에서 ‘또 다른 끝’이 있는 공간으로 이어지는 것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일종의 로드 무비이기도 한 이 작품 속에 ‘세상의 끝’이라는 단어가 주는 긴장감은 존재하지만, 소녀들의 모습은 이와 견줄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그들의 밝고 명랑한 이미지와 그 단어가 대조를 이루어 흥미로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의 끝’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여정의 시작을 위해 형성된 단어에 불과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유일하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침이 밝아오고, 한 소녀가 일어나 문을 통해 밖을 바라본다. 나머지 아이들은 자고 있다. 같은 공간에 있던 아이들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대화를 나눠왔다. 그게 설령 어떤 의미도 없어 보이는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그들의 목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다다르자 소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잠들었기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들은 지하철에서도 잠들었으며 이때 공간의 소리는 명확하게 들려오고 이들은 계속해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단순히 마지막에 움직이지 않고 말 없어진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동행한 것일까. 이 작품 역시 다른 작품들처럼 ‘흥미로워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장면’만을 위해 이전의 시간을 할애한 것일까.
결론적으로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 어떤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이 글 역시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까지의 여정을 함께 해야만 작품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지루해질 수도 있는 대부분의 장면들의 희생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한다. 다행히 <종착역>은 침묵이 존재하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닌, ‘이야기를 위해’ 마지막 장면을 넣을 것으로 보인다. 상기해보자. 우리가 마지막 장면과 마주하기 전까지 본 것은 정말 아이들의 밝은 모습뿐이었을까.
죽음의 흔적
<종착역>의 여정에서 관객들은 네 명의 소녀들과 함께 다양한 공간을 지나왔다. 목적지는 ‘세상의 끝’이었다. 중학생이 된 후 첫 여름방학, 이때 아이들의 모습은 ‘시작’에 가깝기에 ‘끝’이라는 단어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아이들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끝이란 게 무엇일까.’ 그리고 이 질문은 관객의 기억과 공명하며 ‘죽음’이라는 단어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사실 이 작품의 매 순간에는 ‘죽음의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앞서 거쳐온 그 흔적들의 종착지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모습, ‘이가 빠진’ 모습, 아무도 없는 ‘경로당’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그 흔적들이다. 단지 그것들이 소녀들의 대화 속에서 제한된 모습을 띠고 있지 않았을 뿐, 소녀들과 우리는 죽음을 지나쳐왔다. 결국 아이들은 죽음에 가까운 공간에서 하루를 보낸 것이다. 이 때문에 새벽에 자고 있는 아이들의 부동(不動)의 모습이 죽음의 이미지를 발산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자는 친구들의 모습을 본 한 소녀는 문을 통해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홀로 잠에서 깬 소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가만히 앉아 밖을 보던 소녀는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다. 혹시 소녀는 드디어 ‘세상의 끝’에 다다른 것일까. 여전히 14살 소녀일 뿐인데. 그런데 몇 시간 전만 해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이 자고 있다. 전날 밤에 한 소녀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 이상할 것 같다’고 말했다. 밤이 되며 찾아온 막연한 죽음의 공포 속에서 대화는 상상마저 힘든 미래와 함께 마무리되었고, 날이 밝자 서로를 보호해주던 목소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홀로 잠에서 깬 소녀는 ‘남겨진 자’가 되었다. 그 잠깐의 순간, 소녀는 멀리 있는 죽음과 눈이 마주친 것이 아닐까. 관객인 우리 역시 과거 어느 지점에서 느꼈던 것처럼.
결국 <종착역>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알아가는 아이들의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이는 사진으로도 (다소 직접적으로)드러나는데, 초반에 아이들이 찍는 것들은 정적인 풍경이지만, 점점 인물의 시점을 통해 피사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고양이와 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에서는 정적인 풍경과 움직이는 요소가 결합하여, 사진과 영상의 경계가 어물어지며 그간의 사진 속 풍경과의 차이를 드러낸다. 결국 당연하게도 ‘세상의 끝’이란 것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세상을 보는 각자의 시각으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소녀는 어렴풋이라도 짐작했으리라. 그런 점에서 경로당에서의 아이들을 찍는 카메라의 시점은 어느 순간 세상의 끝에 서 있는 ‘누군가의 시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언급했듯 <종착역>은 죽음과 성장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를 갈등이나 확연한 해소를 사용해 직접적으로 부각하지 않는다. 단지 필연적인 부동(不動)을 통해 설득시킨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목소리들과 인물의 이동은 결국 멈춤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한 과정이었고, 잠시 멈추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끝’이 될 수 있는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 관객인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 역시 그랬고, 거기에 바로 성장이 있었다.
이야기가 어떤 것을 다루냐가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장이나 죽음처럼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너무나 많은 작품들이 다뤄 왔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그리고 <종착역>의 성취는 해당 작품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설득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