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했던 것은 기차의 ‘도착’인가.
2020, 김초의 감독
*이 글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김도영 감독의 단편작 <자유연기>(2018)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 작품을 함께 보신 뒤 글을 읽으시면 더욱 좋다고 생각합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한 해에 적어도 한두 번씩 기분 좋게 마주하는 듯한 한국 영화이다. 예를 들면 작년 2019년의 <메기>(감독 이옥섭)와 <국경의 왕>(감독 임정환) 등이 그런 작품일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의 매력을 따져본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역량과 대사의 힘을 기저로, 영화 속 장면의 마디마다 웃음의 요소를 담아놓는다는 점이다. 감각적인 연출이다. 그렇다고 위와 같이 현재 다양성 영화로 분류되는 작품들을 관객들이 선택하는 이유는 분명 이런 매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의 흥미로운 점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영화에는 이전에 나온 한국 영화들의 모습이 적잖이 담겨있다. 시작하자마자 보이는 남녀의 술자리가 그 예시일 것이며, 찬실(강말금)과 장국영(김영민)이 운동기구들이 즐비한 야외에서 심각한 듯 이야기하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광국 감독의 <꿈보다 해몽>(2015)을 상기시킨다. 흥미롭게도 이 모두 감독 ‘홍상수’의 자취를 보여준다. 이와 함께 김초희 감독의 전작들을 확인해보면, 영화를 통해 이 감독이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앞서 언급한 <메기>와 <국경의 왕> 역시 각 작품을 연출한 감독의 단편 영화들과 같은 인장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좀 더 흥미로운 지점은 감독 김초희의 전작들이 아닌, 배우 ‘강말금’의 전작에서 발견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그녀의 첫 장편 주연작이다. 그녀의 모습은 몇 개의 단편작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작년 2019년 상당수의 영화제에서 배우의 연기를 놓고 가장 많이 언급된 단편작은 분명 그녀가 주연을 맡은 <자유연기>이다.
<자유연기>를 본 이들이라면 강말금 배우의 모습이 반가울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자유연기>는 영화라는 예술에서 배우들의 위치와 그 존경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강말금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내세워 드러낸다. 게다가 가장 클라이맥스로 보이는 ‘자유 연기’ 장면은 그저 장르적인 방식을 사용한 연기의 향연이 아닌, 연기라는 행위에 목마른 많은 이들의 모습을 대표하여 배우라는 직업의 선택을 일종의 숙명이자 운명으로서 설득한다. 이때 그녀가 선택한 연기는 ‘눈물 연기’이다. 누군가 본인의 진심을 설명하려 한다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가장 좋은 방법은 눈물일 것이다. 그래서 <자유 연기>에서의 눈물은 그 자체로도 힘을 갖고 있지만, 연출의 의도일지는 몰라도 그 눈물은 그 순간 캐릭터가 아닌 배우의 진심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오롯이 그 순간은 강말금이라는 배우 본인만의 순간이 됐다. 그런 그녀가 장편작의 주연을 맡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우리가 한 영화감독의 작품을 찾아보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작품임에도 같은 핏줄을 갖는 순간들을 마주하는 기쁨에서 발생한다. 즉, 같은 감독의 작품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연출의 면에서 공유하는 순간이 조금이라도 없다면, 각 작품의 완성도를 확인하는 측면에서 감독의 공로는 줄어들게 된다. 반면 배우의 역할은 확실히 다르다. 장르 영화의 경우라면 매번 같은 캐릭터를 표현하는 배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상업적 측면에서 ‘안정성’이라는 이유로 늘 똑같이 선택된다. 그러나 일종의 작가주의 영화일 때, 매번 같은 패턴의 캐릭터를 한 배우가 연기하는 경우 그 배우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리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박종환’ 배우가 이런 식의, 적잖이 아쉬울 때가 있는 예시일 것이다.)물론, <자유연기>와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강말금 배우의 캐릭터는 확실히 달라 보인다. 직업, 상황, 성격적인 거의 모든 측면에서 다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공유하는가. 결론적으로 이 배우가 장르적으로 두 영화를 공유하도록 만드는 요소는 눈물이다.
작품 속에서 ‘찬실’이 가장 슬프게 우는 때가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주인 할머니(윤여정)가 쓴 '시'를 보고 난 순간일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그동안 찬실이라는 캐릭터와 동행해 온 길을 되돌아보며 관객이 공감의 순간을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 밖에서 ‘캐스팅’이라는 행위를 생각한다면, 강말금이라는 배우가 장편작에 출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상당 부분이 <자유연기>의 모습, 특히 거기서 보이는 오열의 모습에 있기에, 찬실의 갑작스러운 눈물은 아쉽게도 장르적인 순간이 되어버리며 일시적으로 이야기의 몰입은 방해된다. 그런데 영화는 그 시간을 최소화시킨다. 강말금 배우를 찬실로 만든 이유 중 하나는 분명 눈물이었겠지만, 영화는 그 눈물이 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설득력은 눈물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강말금 배우의 연기에서 눈물과 같은 위치에 있는 또 하나의 요소는 ‘아코디언’이다. 아코디언 역시 <자유연기>에서 그녀가 연주한 악기이다. 그런데 이 악기의 출현은 갑작스러워 보인다. 그 전까지 찬실이라는 인물이 아코디언을 다룰 줄 안다는 사실은 어느 장면에서도 눈치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장국영과 헤어질 때 찬실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순간은 <자유연기>에서 지연(강말금)이 그것을 연주하는 모습과 겹치도록 영화가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때 역시 영화 밖의 또 다른 작품과의 관계는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다. 그러나 찬실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장면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자유연기>에서 지연이 눈물을 흘리며 자유 연기를 하는, 오롯이 배우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 본인만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그 이유는 이 장면의 연출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장국영이 아코디언을 가져오는 때부터, 찬실이 아코디언을 다 불 때까지 화면 전환 없이 오로지 클로즈업 샷만을 사용하여 보여준다. 앞서 말했던 <자유연기>에서의 ‘자유연기’장면과 같은 효과를 갖고 있으며, ‘아코디언’은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인 동시에 배우만의 순간을 형성하는 요소가 되면서,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마치 마술과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것은 <자유연기>를 포함한 여러 작품들과 함께 영화의 의도를 파악하는 부가적인 방식이다. 그렇다면 영화 자체는 어떤 방식으로 찬실의 변화를 설득하고 있는가.
영화는 시작부터 지감독(서상원)의 죽음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클로즈업 샷이나 누군가의 시점 샷을 쓰지 않고 다른 인물들과 같은 프레임 안에 놓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이야기 속 첫 사건의 시작을 알린다. 덕분에 영화는 사실상 죽음으로 시작하지만,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보이지는 않고, 유머는 유머 그 자체의 힘을 잃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기능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찬실이 이사를 간 날, 함께 간 그녀의 동료들이 바로 앞에 보이는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주인 할머니가 그 방은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데, 적어도 영화가 끝나기 전에 그 방의 비밀을 밝혀질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수많은 이야기를 겪어 온 관객에게 그 방과 연결되는 무의식중 하나는 누군가의 죽음일 것이다.
또한 죽음과 관련된 초반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찬실의 꿈으로 보인다. 산성 외곽을 따라 걷고 있는 찬실, 이때 영(배유람)이 그녀를 뒤따른다. 그를 돌아본 찬실은 왜 따라오냐고 묻고, 영은 따라가야 할 것 같아서라고 말한다. 그런 뒤 두 사람은 포옹한다. ‘10년 만에 남자와 처음 안아본다’는 찬실의 말과 함께 이 장면은 그녀의 무의식적인 욕망과 영화적 유머가 결합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이것은 꿈이다. 꿈에 대한 해석에서 가장 흥미로운 방식 중 하나는 꿈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전부 본인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인데, 물론 찬실의 욕망 중 하나는 그날 오후에 처음 본 영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일 수 있지만, 이때 좀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영의 대사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왜 따라오냐는 찬실의 물음에 그는 ‘따라가고 싶어서’가 아닌, ‘따라가야 할 것 같아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찬실의 입장에서 영이 그녀는 따라가는 이유는 그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찬실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어쩌면 그것은 찬실의 죽음, 좀 더 정확히는 그녀의 ‘자살’일지도 모른다. 즉, 그녀는 지감독이 죽은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본인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고, 동시에 그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누군가 따라와 자신을 구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죽음을, 그것도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 것일까. 이야기가 죽음으로 시작해서일까. 그러나 사실 이야기의 순서로 따진다면 가장 앞에 오는 이야기는 죽은 감독이 영화를 위한 고사를 지내는 장면이다. 이로써 영화는 찬실이 마주한 죽음의 이미지는 오로지 같이 일하던 죽음에서 시작된 것을 아닐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남긴다. 또 다른 이유는 그럼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의 죽음이며, 정확히는 의도치 않은 찬실과 영화의 단절이다. 그녀는 분명 영화를 사랑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영화는 일이 되었고, 이제는 그 일마저도 못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금전적 문제를 마주한다. 그리고 이것은 죽음이라는 마지막 연결고리를 갖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예 없어진 희망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유머를 사용해도 돈이 없어 비굴해지는 듯한 주인공의 모습은 너무나 간편한 방식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수중에 돈이 없다는 찬실은 초반부터 소피(윤승아)의 집에서 일을 시작하고, 그리고 영이라는 캐릭터를 만난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영이 가르치는 것이 ‘불어’라는 사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장국영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모습이다. 이때 그 영화는 기차의 시점을 보여준다. 찬실의 변화 중 하나는 다시 영화를 시작하는 것인데, 영의 불어와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것이 노골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우리는 이 작품이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하려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에 만든 ‘기차의 도착’은 영화 역사상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뤼미에르’의 뜻은 빛인데, 마지막 찬실이 들고 있는 손전등 역시 그 연장선에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의도치 않은 힘든 상황에 의해 본인의 정체성마저 의심하게 된 인물들에게 위로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영화라는 예술과 함께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설득해낸다. 그런 면에서 장국영의 존재는 영화 자체로도 보이지만, 영화에 대한 사랑을 잊어가는 찬실 본인의 무의식적인 갈등이자 방어 기제로 보인다. 그런데 찬실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순간, 장국영은 영화에 대한 사랑을 다시 찾은 찬실의 이마에 입맞춤하고 사라진다. 분명 이것은 그가 더 이상 찬실의 곁에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더 보게 된다. 그것은 가장 마지막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그의 모습이다. 결국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 찬실이 또 한 번 영화에 대한 회의감을 느낄 때 나타날 수 있다는 여지로도 볼 수 있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그의 마지막 (뒷)모습은 그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캐릭터를 보류하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즉, 영화에 대한 누군가의 애정으로서 형상화된 그는 찬실만의 방어 기제가 아닌, 감독을 포함한,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무의식적 형태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법을 잠시 잊었다가 다시 찾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 왔고 앞으로도 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같은 결을 갖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영화의 시초부터 파고들어 설득해내려는 태도를 보면, 어쩌면 감독 김초희는 영화와 재회한 경험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순간순간의 그 경험을 스스로 체험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박수를 치며 떠나는 장국영의 모습은, 찬실의 모습이 되고, 감독의 모습이 되며, 마침내 우리의 모습이 된다. 그리고 기차는 도착하지 않고, 계속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