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수 성공에서부터 중국 교환학생, 미국 인턴, 남미 여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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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 21살, 입학하고 과대를 맡다.
2016년 - 22살, 중국 하얼빈으로 교환학생에 가다.
2017년 – 23살, 아태물류학부에 관심이 생겨서 복수전공을 시작하다.
2018년 – 24살, 영어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다.
2019년 – 25살, 미국으로 인턴을 떠나다.
그리고 현재 2020년 – 26살, 남미 여행을 떠나다. 나다운 모습을 찾기 시작하다.
2015년 – 21살, 입학하고 과대를 맡다.
입학 전 사전 동기모임을 통해 친해진 몇 명의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과 팀을 꾸려 OT (오리엔테이션)에서 EXIT의 '위아래'라는 노래로 장기자랑에 나가보자고 계획을 짰다. 1~2주 동안 열심히 연습했고, 당시 엄청난 환호와 함께 문과대 1등을 거머쥐었다. 이 당시에 내게도 리더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과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대에 신청을 했고 결국 과대로 선출이 되어 1년 동안 과대를 맡을 수 있었다. 70명 가량의 동기들에게 학과의 공지 사항을 전달하고 학생회 회의에 참석하고, 축제 때 주점을 운영하는 활동 등을 진행했다. 이 당시 가끔씩- 친구 생일 때 새벽 3~4시까지 술을 마시다가 다음 날 수업에 들어가서 출석 체크하고 몰래 빠져나와 기숙사에 돌아가서 낮잠 자던 일, 시험공부를 하다가 기숙사 휴게실에 잠시 쉬러 갔는데 친구를 만나게 돼서 같이 TV에 나오는 양꼬치를 군침 흘리며 보다가 11시에 헐레벌떡 나가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양꼬치와 맥주를 먹고 마시고 기숙사 통금 시간인 12시에 맞춰서 엄청난 속도로 뛰어왔던 일 등의 여러 추억들은 친구들과 아직도 회상할 정도로 추억으로 남아있다. 가장 재밌고 후회 없는, 순수하면서도 열정 넘치던 1학년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2016년 - 22살, 중국 하얼빈으로 교환학생에 가다.
최대한 빨리 교환학생에 가고 싶었다. 내게 대학은 곧 교환학생이지! 라는 생각이 있었을 정도로 교환학생을 가능한 한 빨리 다녀오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알아보니, 1학년 과정만 수료하면 바로 지원이 가능하다고 해서 2학년 1학기 교환학생 과정을 신청했다. 원래는 상해로 가고 싶어서 상해 지역으로 신청을 했었지만 떨어지고 2 지망으로 제출했던 하얼빈 공업대학교로 가게 되었다.
기대를 품고 갔던 첫 해외살이는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중국에 가면 중국인 친구들 많이 사귀어서 자주 여행도 다니고 열심히 중국어 배워서 원어민처럼 중국어를 구사해야지. 중국에 가기 전 당찬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하얼빈은 생각보다 너무 추웠고 갈 곳이 많은 동네도 아니었다. 중국인 친구를 여럿 사귀고 싶다는 내 초반 목표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갈수록 학교 수업이 재미없게 느껴져서 자주 수업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60점 이상이면 Pass 였는데, 어떤 과목은 겨우 60점을 넘겨 통과했을 정도로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내가 꿈꿔왔던 해외생활의 이상과 현실에 큰 괴리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점점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학교 수업에는 잘 적응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1년 동안 후회 없는 행동을 한 것이 있다면 바로 여행이다. 원래도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고 중국에 있는 시기를 이용하여 그 큰 중국의 수많은 도시들을 최대한 다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시간이 날 때마다 여행했다. 청명절, 노동절, 국경절 등 중국의 긴 연휴와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총 12개의 도시를 여행했다.
(베이징北京,톈진天津,따리엔大连,칭다오青岛, 상하이上海, 지난济南, 우한武汉,충칭 重庆,청두成都,쿤밍昆明,따리大理,리장丽江)
친구와 시간이 맞을 때는 친구와 여행을 했고, 엄마와도 여행을 하고, 아무도 시간이 맞지 않을 때는 혼자서라도 여행했다. 이 여행이 먼 훗날 엄청난 도움이 될지 몰랐다.
중국어 실력이 늘은 건 여행 중 중국인과 부딪혀가며 말한 중국어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학교 수업에 충실하지 못했던 만큼 여행에서 실전으로 부딪히며 중국어를 사용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1년의 교환학생 과정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하얼빈의 빙등제를 보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017년 – 23살, 아태물류학부에 관심이 생겨서 복수전공을 시작하다.
중국에서 시간을 너무 헛되이 보냈다는 생각에 열심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해졌다. 우선 복수전공부터 신청하기로 했다. 소비자학과, 아태물류학부, 경영학과 등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는데 고민을 하다가 아태물류학부로 선택하게 되었다. 이유는 우선 공대를 제외하고는 제일 명성이 높은 과라서 학교에서 엄청난 지원을 해주는 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 당시 택배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중국에 있는 동안 타오바오淘宝라는 사이트로 엄청나게 쇼핑을 했었는데, 신기하게 공장이 몰려있는 광저우 广州에서 하얼빈까지 약 3300km로 굉장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택배가 2~3일 만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서울-부산의 8배가 넘는 거리를 2~3일 만에 배송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외에도 중국의 11월 11일 (광군제)에 엄청난 수량의 택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까 택배와 물류라는 것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게 아태물류학부 복수전공을 시작하게 되었고, 굉장히 똑똑한 아태물류학부 친구들을 이기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하게 되었다. 교수님 강의를 녹음해서 반복해서 들었으며, 잘 이해가 가지 않던 과목들은 유튜브로 관련 영상을 찾아보며 알아낼 때까지 공부했다. 그렇게 처음엔 이해력이 느리던 나는 반복과 꾸준함을 통해 점차 성적이 좋아짐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에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친구에게 소개를 받아 서울 신라면세점 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 편집숍에서 일을 했었는데, 보세구역 (외국 물건 또는 일정한 내국 물건에 대해 관세법에 의해 관세의 부과가 유보되는 지역. 면세점에서는 이를 면세품들이 있는 구역이라고 불렀다.) SKU (StockKeeping Unit - 재고유지단위) 등 아태물류 수업에서 배운 것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을 보니까 더 재밌게 일을 했던 것 같다. 인하대에서 서울 동대입구역까지 왕복 4시간이 걸렸는데, 하루 종일 서있었던 부은 다리로 1시간 반 동안 버스에서 서서 집에 돌아가는 날이면 무척 힘이 들어 체력이 고갈되곤 했지만 그래도 돌아와서 운동하고 공부까지 하고 잠든 걸 보면 나 자신이 뿌듯할 만큼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또 한 사건이 있었다. 23살 여름방학, 우연히 아태물류학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는데 해외 물류 탐방에 대한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중국 정저우에 가서 중국 기업 3~4개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인데 모두 다 학교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한다. 애초에 중국 물류시장에 관심이 생겨서 복전을 시작하게 된 나로서 이는 무조건 잡아야 하는 기회였다. 그러나 정말 아쉽게도 지원자격이 “아태물류 생” 만 해당되었다. 복전생은 아예 신청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좋은 기회를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일단 지원서부터 제출했다. 지원서를 제출하고, 담당자분께 전화를 걸어 이 프로그램에 대한 나의 관심과 절실함을 이야기하고 꼭 참여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담당자분이 이미 정원에 맞게 모집이 되기도 했고, 복전생은 참석이 어렵다고 난처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고, 학과장님께 내가 아태물류 복전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 왜 이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싶은지. 가서 어떤 점을 얻어오고 싶은지 등을 메일로 길게 작성하여 보냈다. 나의 간절함은 결국 성공했다. 정말 우연히도 1명이 그 프로그램을 취소하게 되어 나를 넣어줄 공석이 생겼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 날 정말 온 세상이 내 것 같다고 느꼈다. 소중한 기회를 얻어 해외 물류 탐방 프로그램에 참석을 했고, 중국인 교수님께는 통역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어로 질문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거기서 알게 된 팀원들과는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연락하며 지낸다. 이때 느낀 것이, 정말 간절하다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인하대 합격에 이어 두 번째로 내가 끝까지 절실하게 매달려 얻게 된 결과였다.
2018년 – 24살, 영어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다.
아태물류학부 생활을 시작하며 점점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감을 잡아가며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되었다. 그러나 수업을 들을 때마다 자신감이 확 꺾이는 분야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영어였다. 아태물류학부 복전을 하기 전에 고민을 했던 부분도 영어였다. 다들 영어를 잘할 텐데, 나는 어떡하지? 중학생 때까지는 영어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고등학교 2, 3학년 때부터 영어를 손 놓기 시작하며 수능 영어 5등급이 나왔다. 수능을 친 이후에는 더 이상은 영어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크게 개의치 않고 살아왔었다. 가끔씩 있는 교양 영어 과목에서는 적당한 족보와 요령으로 그런대로 시험을 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영어가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태물류 교수님들이 영어는 그냥 기본적인 것이고, 다른 외국어를 추가로 하면 플러스 요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래도 중국어는 할 수 있는데 그걸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니. 약간의 충격을 받고 자신감을 잃었다. 또한 영어로 진행되는 아태물류 수업이 몇 개 있었는데, 수강생 중에 반이상이 영어를 엄청 잘하는 것이었다. ‘우와… 역시 아태물류가 센 이유가 있었구나.’ 그때 위축감이 들었다. 거기에 중국어를 배우며 점차 기본적인 영어도 까먹어 간다는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은 different와 difficult 가 순간적으로 헷갈려서 말 못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약간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거쳐갈 관문 중에 토익이라는 시험이 있는데, 영어를 못하니까 당연히 토익 공부를 하기 싫었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가, 2018년 겨울 방학을 통해 더 이상은 피할 곳이 없어 토익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맨 처음 모의고사 때는 신발 사이즈 (230 센티… / 990점 만점) 정도의 점수가 나왔다.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초, 중, 고등학교 장장 12년 넘게 배운 영어가 어떻게 이렇게 단 하나도 써먹을 것이 없는지 … 처음엔 1월~12월이 영어로 뭐였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수준이었다.
더 이상은 물러날 곳이 없다. 그래 인정하자, 나는 영어를 못한다. 근데 이런 식으로 회피한다면 영어는 평생 내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냥 지금 제대로 공부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1 형식 ~ 5 형식, 접속사 등 내가 죽도록 싫어했던 영어 문법을 기초부터 하나하나 다 정리했다. 학원 수업에 매일 참석했으며 숙제도 최대한 열심히 해갔다. 그러니까 신기한 일이 생겼다. 1월, 2월 …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토익 성적이 오르는 것이었다. 650점으로 시작한 점수가 나중 가서는 880점까지 오르게 되었다. 영포자였던 내가 이렇게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점차 자신감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Speaking 은 하지 못했었는데 영어에 관심이 생기니까 스피킹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지금 0에서 50을 만들어냈는데, 그럼 0에서 98을 만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야.
그런 생각으로 유튜브의 ‘디바 제시카’ 300 문장 영상을 보며 쉬운 표현부터 외워갔다. 이렇게 영어에 대한 관심으로 4학년 시기를 보내고 있던 도중, 취업에 대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나는 아직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자소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고등학생 때 몇 번 면접에 떨어졌던 경험 때문에 면접을 생각하기만 해도 불안한데. 인생이 너무 막막하고 취업이 하기 싫었다. 그냥 두려웠다. 어디론가 회피하고 싶었다. 그러던 도중 우연히 “미국 인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 프로그램에 갑자기 꽂히게 되었다. 이거다! 취업은 하기 싫은데,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보낼 수는 없고. 영어도 사용하면서 일을 경험해볼 수 있는 곳. 그게 바로 미국 인턴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자마자 또 아태물류 사무실로 달려가서 지원을 했다. 무엇이든 시작하면 쇠뿔도 단 김 에빼는 성격 덕분에 미국 인턴이라는 프로그램 공지를 본 지 2달 만에 나는 높은 산만 같았던 여러 과정 (자기소개 동영상 촬영, 영어 테스트, 고용주 면접, 비자 면접 등)을 다 마치고 학기를 마치자마자 12월 26일에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2019년 – 25살, 미국으로 인턴을 떠나다.
이번에도 또 캐리어 2개만 달랑 들고 미국에 도착했다. 출근할 회사만 정해져 있었고 어디에 살지, 어떤 차를 사야 할지 (* 미국은 땅이 워낙 넓어서 통근하기 위해 차를 구매하는 인턴들이 많다.) 하나도 정해진 게 없는 채로 도착을 했다. 유심 만들기, 은행 계좌 만들기와 같은 일은 3년 전 중국에서 이미 해봐서인지 큰 문제없이 금방 처리했다. 그러나 미국엔 공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일을 하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더 복잡했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다. 합법적으로 일을 하고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SSN (Social Security Number)라는 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사회보장 넘버를 만들어야 했고 한국에서 만들어간 국제 운전면허증은 무용지물이었다. 캘리포니아주는 무조건 그곳의 면허시험을 보고 면허증을 만들어야 했기에 필기와 실기 시험을 다시 준비해서 면허를 취득했다.
다행인 것은 집을 굉장히 좋은 곳에 얻었다는 것이었다. 회사와의 거리가 차로 왕복 2시간 거리이긴 했지만,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그래도 그렇게 먼 축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집은 미드나 영화 속에서 보던 굉장히 넓은 2층 집이었다. 미국에 1세대로 이민을 와서 성공하신 한 할머니께서 별장처럼 사용하려고 구매하신 집이라서 1년 중 절 반 이상은 그 큰 집에서 혼자 보냈다. 집 바로 앞에 골프장이 있었는데 내다 보이는 뷰가 마치 천국 같았다. 이 곳은 천국이로구나. 중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맑은 공기에 아름다운 야자수들 그리고 그렇게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 캘리포니아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아니, 좋은 곳일 줄만 알았다. 차를 산 지 두 달 만에 교통사고가 난 것이다. 다행히 몸은 크게 안 다쳤지만 충격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었고, 차는 아예 박살이 나는 바람에 폐차를 시키게 됐다. 일시적인 충격으로 몸을 못 움직이는 바람에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게 되었는데 모든 게 무서웠다. 가족이 너무 보고 싶었고 누구든지 보면 엉엉 울 것 같았다. 몸은 아프고 사고가 난 게 처음이라 어떤 식으로 보험을 처리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더군다나 배터리도 20% 밖에 안 남아있는 상황이라서 아껴 쓸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두렵고 외로운 상황이었는데, 결국 이 모든 과정을 혼자 어떻게든 이겨내야 함을 깨달았다. 응급실에서 3시간 정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후에 1주일 후부터 엄청난 Bill 들을 받았다. 앰뷸런스 비 1500불, 응급실 CT 촬영비 4000불, 의사 검진료 300불, 그리고 차 견인비 1500불. 아, 이래서 미국에서 아프던 집안 기둥뿌리 하나 뽑는다고 하는구나. 예전에 영화 ‘식코’에서 보았던 미국 의료보험제도의 폐해를 직접 느끼는 계기가 됐다.
사고 이후, 오래 걸렸지만 보험사에 연락하여 다행히 관련된 Bill 들을 한 개씩 처리를 했고 일은 아픈 와중에도 계속 나갔다. 사고 난 다다음날마저도 아픈 팔로 겨우 운전을 해서 회사에 출근해서 밀린 일을 처리한 것을 보면 그래도 책임감은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힘든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또 좋은 날도 많았다. 한 달에 1~2번 주말에 시간을 내어 캘리포니아의 이곳저곳으로, 미국의 이런저런 도시로 여행을 해서 1년 동안 무려 미국의 10개 도시와 5개의 국립공원, 2번의 캐나다 여행을 했고 엄청난 자연환경에 압도당하기도 했다.
총 2년간의 중국과 미국 생활을 통해 깨달은 게 있다면 어느 곳이던 내가 꿈꾸는 완벽한 유토피아 같은 곳은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안 좋은 공기와 비교적 낮은 시민 의식 때문에 불만이 있었다면, 미국에서는 매우 느린 행정 시스템, 상상을 초월하는 병원 진료비 등의 문제가 있었다. 또한 가족들과 친구들이 없는 것은 참으로 외로운 일이었다. 특히 명절이나 생일 등을 혼자 보낼 때는 아무리 내가 독립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해도 외로울 때가 많았다.
2년 간 외국살이를 하며 호되게 당했고, 더 이상은 그 어떤 나라도 100%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느 날은 처음 보는 엄청난 광경들과 좋은 친구들 덕분에 엄청나게 행복했고, 또 어느 날은 우울이 바닥을 쳤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 쓰라리고 힘들었던 경험들이 나를 성장시킨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대학교에 들어가서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을 가거나, 해외살이가 하고 싶다면 이 말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해외살이는 이상만큼 결코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이다. 엄청나게 외롭고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거기에서 겪은 수많은 일들이 결국은 나를 성장시킨 원동력이 되었음을 발견할 테니 자신의 강인함을 마주하기 위해 기회가 있다면 꼭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현재 2020년 – 26살, 남미 여행을 떠나다. 나다운 모습을 찾기 시작하다.
미국 인턴을 마치고 1년간 미국에서 살았던 모든 짐을 한국에 택배를 붙인 채 2019년 12월 31일, 남미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플로리다를 경유하여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 도착을 했고 그 날부터 40일간의 나 홀로 남미 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지는 총 다섯 나라였다. 페루에서 시작해서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마지막으로 브라질까지. 한국인들에게 국민 루트라고 불리는, 남미를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루트였다. 처음에는 다른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에 변동이 생겼고, 결국 혼자라도 가기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남미 위험하다는데 혼자 괜찮겠어?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40일 동안 혼자 여행을 하며 단 한 번도 위험에 처한 적이 없었고 그저 내가 조심만 한다면 어느 곳이든 사람 사는 곳이고 잘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미는 그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기 힘든 머나먼 곳일 뿐이어서 낯설게 느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40일 여행하는 동안 모든 게 이상적이진 않았다. 지친 마음에 한국에 돌아오고 싶었을 때도 많았고 외로울 때도 많았다. 누군가와 함께 멋진 풍경 앞에서 “캬, 너무 좋지 않냐?” 하며 맥주 한잔 하며 하루의 노고를 풀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동행을 구하지 못해 혼자일 때가 더 많았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중고등학생 때 교과서로만 보던 마추픽추를 실제로 가본일. 볼리비아에서 하늘과 땅이 구분이 안 되는 황홀한 우유니 사막 한가운데서 걸었던 일. 또, 지구 반대편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인 모아이 석상이 있다는데. 내가 과연 살아서 그걸 볼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그 모아이 석상 옆에서 동행들과 다 같이 점프샷을 찍었던 일.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지역에서 빙하가 깨져서 떨어지는 모습을 실제로 본 일. “피츠로이”라는 산의 정상에 있는 불타는 고구마라는 삼봉 (3개의 봉)을 보기 위해, 혼자서 새벽 1시 반에 손전등 하나 들고 등산을 시작하여 장장 11시간 동안 산행길에 올랐던 일. “리우”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을 보는 것을 꿈으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 예수상 아래에서 예수상과 같은 모습으로 팔을 벌리고 사진을 찍은 일 등.
엄청났던 일들이 많아서 이 짧은 글에 다 기록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40일 동안 혼자여서 외로울 때가 많았지만, 혼자여서 더 강인해질 수 있었던 그런 여행을 하고 북, 남아메리카 대륙과 정말 마지막 인사를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1년간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 취업 준비할 겸, 그동안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배우면서 살고 있다. 4월에는 한 달 동안 요리를 배웠고, 5월에는 한 달간 바리스타 수업을 들었다. 또 중간중간 영어와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사니까 너무나 행복하다.
또한 어느 순간부터 공부가 즐거워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중고등학생 때까지는 목적의식 없이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무작정 공부하다 보니까 효율성도 없고 책상에 오래 앉아있어도 점수가 오르지 않았었다. 그러나 세계 20개국을 여행하며, 또 중국과 미국에서 생활하며 세상의 많은 것들을 직접 보고 접하다 보니까 자연스레 그것들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왜 그렇게 멕시칸들이 많은지, 왜 전 남미 사람들이 스페인어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그런 역사에서부터 시작되어 왜 남미의 국가들이 그렇게 시위를 하고 있는지. 등 정치 경제 지리 전반적인 부분들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 쳐다보지도 않았던 세계사, 지리 등을 스스로 책을 찾아보며 공부하게 되었다. 만약에 내가 고등학생 때 세계여행을 했더라면 조금 더 일찍 세상에 관심이 생겼을 텐데. 약간의 아쉬움도 있으면서, 지금에라도 공부에 욕심이 생겨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나의 이야기이다.
19살까지만 해도 나는 꿈이 많은 아이가 아니었는데, 재수에 성공하고 학교를 다니며 또 여행을 다니며 점점 꿈이 많아지고 삶에 대한 욕심이 커지게 된 것 같다. 평범했던 내가 점점 큰 물고기가 되어가면서 세상이 이렇게나 크고 놀라운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재수할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렇게 원하는 것들을 실제로 다 이루면서 살게 될지 꿈에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세상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고등학생 후배들에게 내가 경험해온 이 모든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며칠에 거쳐 이 이야기를 적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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