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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모 Jul 23. 2021

금요일은 밤이 좋아.

지친 나의 일주일을 위로해 주는 금요일 밤의 식탁.

 드디어 퇴근이다.  

날이 무겁다. 공기도 무겁고, 어둠도 무겁고, 머리도 무겁다. 어깨 양쪽으로 엄마곰,  아빠곰이, 정수리에는 아기곰이 올라가서 나를 짓누른다. 일주일간 삶의 더께가 고스란히 내려앉은 걸음마다 깊은 웅덩이가 파인다. 지하철 역으로 뻗은 어둠 속에서 빗방울이 퐁퐁 소리를 내며 투신하는 금요일 밤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찬란하다. 

 거리는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인파지만 제법 북적이는 가게의 불빛 사이로 웃음소리와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연인에게 기울인 우산 때문에 젖은 어깨에서 흙냄새가 피어 나오는  불금족들이 '피로야, 덤벼라!' 소리치며 스쳐간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곰들은 찬란한 불빛에 홀린 듯, 한 마리씩 어디론가로 떠나간다.  내딛는 걸음마다 피로가 툭툭 떨어져 빗물에 섞인다. 샌드맨처럼 몸에서 무겁고 더러운 뭔가가 부스스 떨어져 마음까지 가뿐해진다.  괜히 가슴 한구석이 흥성거리면서 모르는 이와 농담이라도 하고 싶은 금요일 밤이다.  드디어 웬만한 장맛비로는 끌 수 없는 불금의 불꽃으로 시작된 주말인 것이다.


 하지만 내게 주말의 시작을 알리는 진정한 알람은 바로 ‘치킨’.

A브랜드의 바삭하고 깔끔한 오리지널, B브랜드의 단짠단짠 순살, C브랜드의 뼈 때리는 매운맛... 상표도 맛도 너무나 많아서 금요일 밤마다 하나씩 시켜야 하는 법이 있다면 금요일은 영원히 반복되리라.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금요일에는 치킨을 시켜 먹는다. 프라이드 치킨은 미국 흑인 노예들이 주인들이 버린 부위를 먹기 위해 발명한 소울 푸드라는데, 오늘날   한국인 남녀노소에게 치킨만큼 호소력 짙은 '소울 푸드'가 있을까. 

 폴 크리천이 명명한 이 인류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닭 개체수의 폭발적 증가라고 한다. 먼 훗날 우주인이 지구에 와서 이 시기의 지층을 탐사하며 화석을 발굴한다면, 주된 생명체로 ‘닭’을 꼽을 거란다. 지층을 그린 뒤, 닭뼈에 색칠하면 하나의 단층을 이룰거라고. 2015년엔 680억 마리 이상을 소비했다고 하니 어마어마하다.

 딩동, 하고 배달이 도착한 소리가 나면 아이는 핸드폰을 끄고 식탁 앞에 앉는다. 오늘 시킨 것은 단짠단짠의 순살치킨과 소떡소떡 꼬치. 그리고 시원한 맥주가 한 잔 똬악 놓여있다. 지난 한 주간 날 괴롭혔던 모든 중생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건 신이 아니라 넘실대는 황금 거품과 바삭바삭한 치킨뿐. 혀끝에 닿는 기름진 바삭함과 닭가슴살의 담백함이 쌉싸름한 맥주의 탄산과 어우러져 목구멍을 지나 가슴 한 가운데를 쓸고 내려가면, 콧구멍으로 묵은 체증이 푸쉬쉬 빠져나온다. 거기에 치킨무가 아삭아삭 상큼함을 더해주는구나.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여름이면 기장밥에 닭고기를 먹었다. 여름이 제철이기도 했거니와 단백질이 필요한 여름에 가장 손쉬운 고기가 닭이었을 테니. 김득신의 <파적도>에도 보면 고양이가 병아리 한 마리를 냉큼 물고 뒤돌아보며 달아난다. 고양이들은 달아나면서 뒤는 왜 돌아보는지 모르겠지만 고게 또 주인의 화를 돋우는 짓이라 남자는 곰방대를 힘껏 휘두른다. 고양이도 치킨의 맛을 아는지. 

 이 치킨이란 게 미국이나 중국에만 있었는 줄 알지만 우리 조상들도 닭을 기름에 튀겨 먹었다. 다만 올리브유가 아니라 참기름에. 튀김옷도 없이 참기름을 뒤집어쓴 닭을 상상하면 메슥거리기도 하지만 아직 일본에는 참기름에 닭을 튀기는 고급 요리가 있다고 한다. 

  요즘은 염지 된 살코기에 튀김옷에도 시즈닝이 되어 있어서 튀기기만 해도 맛나지만, 내가 어릴 땐 정말 기름에 생닭을 통채로 튀겼다. 일명 통닭! 

 유린기 같은 고급 중국음식은 생일,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에만 먹었지만 통닭은 아니었다. 80년대 센스쟁이 아빠들은 월급날이면 월급봉투에서 가을 은행잎 같은 오천 원을 투척해서 하얀 종이봉투에 은행잎보다 노릇한 통닭을 사 오시곤 했다. 양 날개를 활짝 펼치고 배를 갈라 갈비뼈를 드러낸 모양이 금세라도 날아갈 것 같은 고것의 살점을 뜯어 깨가 섞인 소금에 찍어먹으면 세상에서 우리 아빠가 최고지!

 그러다가 ‘멕시카나 치킨’이란 게 광고에 나왔다. 초등학교 시절 생일상의 3대 지존 중 하나였다. 멕시코 음식을 따라 만들어서 저런 이름인가 했는데, 텔레비전에 최초의 양념치킨은 만든 원조 ‘윤종계’라는 분이 나와서 ‘맵고 시고 달다’라는 뜻으로 만든 이름이라고 해서 무릎을 탁, 쳤다. 양념통닭이 어찌나 인기가 많았던지 돈을 불도저로 긁어모았다고 했다. 그 말에 유재석이 ‘지금은?’이라고 물으니 그냥 소탈하게 웃기만 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인생유전 사필귀정이라. 이야, 저렇게 부자일 뻔한 사람도 있구나. 

 

 오고 가는 맥주가 술술 넘어간다. 다시 채널을 돌리니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최고를 갱신한다고 난리다. 주가가 올랐다가 내렸다가 부동산이 또 올랐다가 재개발이 된다나, 어쨌다나. 치킨을 먹으며 보는 텔레비전에서는 생과 사를 오가는 이야기의 조합이 과히 하드코어다. 불금에 물을 끼얹는 이야기들이다. 이럴 땐 알코올로 불씨를 살려야지. 순살치킨이라 닭다리가 없는 게 아쉽지만 대신 다투지 않아도 된다.

 사실 요즘 나이를 먹었는지 치킨이 예전만큼 맛있진 않다. 치킨보다 맛있는 음식이 많기도 하고. 잔을 다 비우고 나면 상추없는 삼겹살마냥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선 아빠의 월급날을, 어른이 되어서는 불금을 더없이 즐겁게 해 주었던 치킨이 여전히 위로가 필요한 나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소울 푸드라는 위상에는 변함이 없다. 

 빗소리가 유리창을 명랑하게 두드리는 금요일 밤. 치킨도 다 먹었으니, 이제 일주일을 마감해야지.

 시원한 맥주를 더욱 맛나게 해 주는 치킨이 있어서 금요일은 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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