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악당 이름이다. 그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한다고 데려와 쇠침대에 눕히고는, 몸이 침대 길이보다 길면, 목을 자르거나 다리를 자르고, 짧으면 몸을 잡아 늘렸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자신이 저지르던 악행과 똑같은 수법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 신화에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라는 말이 생겨났다. 융통성이 없거나, 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렇게 신화 속에서 사라졌을까. 새롭게 부활한 그는 더 강력해져 지나가는 행인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재단하여 같은 모습으로 찍어낸다.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침대의 길이에 다른 이를 맞추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아는 수필을 쓰는 여성이 있다. 근래 남편과 사별하고, 딸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하도 마음을 다 잡을 길이 없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느 날 글을 잘 쓴다는 어떤 작가에게 기회가 되어 작품을 좀 살펴보아 달라고 했단다. 그런데 마음을 크게 다치고 말았단다. 온통 빨간 줄로 죽죽 긋고 교정 표시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작품이 난도질을 당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한쪽 말만 듣다 보면 어떤 선입견을 품게 되지만, 그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때로는 단호히 내 소신껏 인생을 사는 것이 필요하듯이 글도 그렇게 쓸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러쿵저러쿵해도 글쓰기에서 정도를 찾기는 어렵지 않은가. 마음에 상처는 입었어도 어떻든 자신의 소신 하나만은 확실하다는 것을 그녀에게서 느꼈다.
전문가라면 사용하는 말이나 문체의 선택과 문장 등등 언어에 막중한 책임이 따르겠지만, 자발적인 글을 쓰면 될 것이다.
쓰는 행위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시작되었으리라. 여하튼 방황하는 마음을 다잡아가면서 소신껏 글을 쓰면서 자신이 만족하면 가장 좋으리라. 꿈보다 해몽이 좋을 때나 주례사 같은 밍밍한 말에서 진심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읽은 글에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비록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