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책,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한 단어나 문장이 내 상황에 맞닥뜨려 불거져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좋은 생각이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무심코 받은 어린 시절 상처가 어른이 된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몸속에 박인 가시를 아픈 줄 모르고 품고 있다가 새삼 그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찔러오는 아픔이란 겪어본 사람만 아는 단장(창자를 자르는 아픔)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왔지만, 사실 그 가시가 내 살을 파고들며 자꾸 찌르고 있었다. 그렇게 어떤 동기로 상처에 덧들 린 가시는 장미 가시나 아카시아 가시처럼 점차 뾰족해지고 억세 진다.
한번 불거진 다음에는 다시 집어넣을 수가 없다. 쏙 하고 삐져나오지 않게 보이지 않는 속 주머니에 넣어 둘 수도 없다. 마음속 가시는 이상하게도 더는 자라지 않기를 바랄수록, 거짓으로 위장할수록 피노키오의 코처럼 더 크게 자라는 이상한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사람의 생활이란 번잡하여, 오로지 불거져 나온 그 가시만 생각할 만큼 한가한 것은 아니라서, 그냥 돋아난 채로 나이를 먹어 간다.
어떤 사람은 그 가시를 바위에서 떼어낸 신석기시대의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돌로 생각한다. 모난 돌도 매만지다 보면 세월에 모서리가 몽돌처럼 둥글어진다고 말하는 너그럽고 긍정적인 사람인 것이다.
전자든 후자든 훗날 생각해보면 그 마음의 가시가 나를 성장시켰다. 지금껏 잘 다스려온 것, 힘들게 버텨온 것들이 다 그런 가시이고 모서리였다.
어느 날 또 드라마를 보다가 저절로, 어떤 계기로 떠 오르기도 하지만, 잊을까 봐 또 잊고 있나 되살려 보기라도 하듯이 떠올려 본다는 것이 참 고맙다. 내면의 가시 같은 생각이 옅어졌다는 증표이다.
다 글쓰기 덕분인 것 같다. 쓰는 행위란 생각이 상처받은 어느 한순간에 머무르지 않고 물처럼 흘러가는 행위 같다. 생각이 흘러 흘러 바다로 가서 소금의 결정으로 거듭나는 응결 행위가 글쓰기 같다.
옛날만큼 힘들지 않고, 그 아픈 상처들을 다 부질없는 생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된 것에 참 고맙다. 적어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슬프면서도 기쁜 것이다. 가시나 화살촉에 파인 상처의 흔적조차 말끔히 없앨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쁜 기억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밀어내는 힘을 기르는 방법으로 글쓰기만 한 것이 없다. 글쓰기는 수도자의 명상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 젊은 수도자가 있었다. 그는 큰 그릇 두 개를 앞에 두고, 냇가에서 가져온 조약돌을 그릇에 넣었다. 그릇에 쌓인 돌로 자신의 마음속에 든 생각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명상하다가 바른 생각을 하게 되면 냇가에서 흰 돌을 주워와서 그릇에 담고, 나쁜 생각을 하면 검은 조약돌을 주어다 다른 그릇에 담았다.
명상하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두 개의 그릇에 조약돌이 수북하게 쌓여갔다.
어느날 그는 미운 사람이 생각나면 검은 조약돌 하나, 길가의 아름다운 꽃을 꺾고 싶다는 생각이 나면 또 검은 조약돌을 하나 담았다. 명상을 마치고 보니 흰 조약돌은 겨우 몇 개뿐이고, 검은 조약돌이 가득했다.
어떻게 하면 검은 돌을 줄일 수 있을까.
그는 명상할 때마다 옳은 일만을 생각하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명상 속에서 눈을 떴다. 그릇에 검은 조약돌이 하나도 없고 큰 그릇에 흰 조약돌이 그득했다.
그는 그때 바른 생각이 바른 생각을 이끌어 온다는 것을 깨우쳤다. 좋은 생각이 어떻게 더 좋은 생각으로 이어지는가를 알려 주고 있다.
나를 가꾼다는 것은 나쁜 생각을 몰아낸다는 것보다, 좋은 생각을 삶이란 그릇에 더 많이 담으며 살아가는 행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