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이 선사하는 위로

희망

by 햇쌀

새벽에 눈을 떴다. 어둑스레하다. 커튼을 살며시 들추자 세상 뿌옇다. 눈을 비비고 허공을 주시해 보았다. 희끄무레한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서리가 내렸나. 몽롱하고 신비로웠다. 그런 기분은 다시 눈꺼풀을 잠으로 몰고 갔다.

"여보, 밖을 봐. 세상이 변했어."
늦잠을 잤나 보다. 커튼을 쓱 밀쳐보니 함박눈이 바로 눈앞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다. 산으로 이어진 드넓은 벌판이 하얗다. 곧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빈터다. 빈터에는 비닐하우스 농가들이 허물어져서 철근과 등이 굽은 길목들이 어지러웠다. 그 자리가 마치 시베리아 벌판처럼 한 가지 색으로 평정되었다. 벌판의 흰색이 떠오른 태양에 빛을 반사하며 신비경에 가까운 세상으로 변했다.
멀찍이 산을 보니 흰색 둥근 모자를 쓴 듯하다. 새벽에 이러려고 그런 모습을 보였구나. 풍경의 전조증상. 아름다운 겨울이다. 2월인데 늦추위가 오려나. 창문은 환하지만 한기가 느껴졌다.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책을 읽었다. 오후에 운동을 하러 가려고 밖에 나갔다. 그랬더니 그 많던 함박눈이 아침햇살에 서리 걷히듯 사라졌다. 길거리와 벌판이 예전의 모습이었다. 입고 나온 두꺼운 외투 속에 훈김이 서렸다.


밤이 되자, 다시 아침햇살에 서리 걷히듯 어둠이 풍경을 걷어갔다.
봄이 왔구나. 봄이 왔어.
봄이 오려니 새벽부터 그렇게 다양한 전조증상으로 풍경이 앓았나 보다. 어떤 봄을 잉태할지 알 것 같았다.
흠, 혹독한 아픔 뒤에 오는... 고요함이 선사하는 위로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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