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세월호

by 햇쌀

자식을 먼저 보낸 애통함에 눈먼 사람 이야기를 들었다.

외할머니는 생전에 다 큰 자식을 둘이나 잃었다. 손주도 앞서 보냈으니, 자식을 잃은 자식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그분만큼 애통하게 가슴을 친 사람이 있을까.

자식을 앞세웠을 때 어떤 일에 몰입하면 천착의 슬픔을 잠시나마 잊고 살 수 있을까.

연기자라면 연기에 몰입 할 것이다. 소리꾼은 소리로 한을 풀어내고, 춤꾼은 춤으로 풀어 낼 것이다. 종교가라면 풀어내는 척도가 다를 것이다. 평범한 외할머니가 더욱더 애처롭게 생각이 드는 이유다. 외할머니가 넘어야 했던 인생의 크고 작은 산은 보통 우리네가 넘어야 할 산과 달랐다.


잊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기억. 오로지 자신만을 믿는 수 밖에 없었으리라. 꿋꿋이 보였는데 한 번 정신줄을 놓으셨던 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것도 매일 다니시던 익숙한 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얼마나 몸서리치는 밤이 많았을까. 그러나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던 사람들의 내면도 외할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직업에 대한 열정으로 한순간은 잊었을지라도, 그 이후에 더 큰 고통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슬픔이나 고통은 극복하는 단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슴 쓰라린 조국을 벗어나, 해외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간다고 해도, 아니 자식의 혼이 서린 땅을 버리지 못하고 잠시 해외로 외유를 감행한다고 해도 정신은 각 단계를 생략하고 회복하긴 힘들다. 인간의 뇌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극복한 사람의 심연은 더 깊고, 말 한마디도 표정 하나도 더 진실이 묻어나지 않던가. 그러나 자식을 앞서 보낸 사람 앞에서는 결코 극복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


쪽 찐 머리에 치마저고리, 너그럽고 복된 인상이 눈앞을 스친다. 할머니는 매일 다니시던 길이 낯설어 보였을까. 낯선 길은 두려움이 없다. 남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낯선 길을 걷고 계셨을 것 같다. 본 적이 없는 산.

코로나19 와중에 오는 봄. 세월호에 탄 청춘들이 물결처럼 스러져갔던 혼미했던 봄이 생각난다. 생때같은 자식이 눈앞에서 물속으로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던 부모 가슴.


지구에서 제일 높은 산이 히말라야 최고봉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높은 산이 있다. 단언컨대, 인간이 한 번도 정복해 보지 못한 산. 자식을 앞서 보낸 고통의 산.

자식 가진 부모로서 이 계절에 이렇게 거듭 삼가 명복을 빕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고요함이 선사하는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