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하이쿠라는 시의 세계가 있다. 한 번에 활짝 피었다가 한꺼번에 흩날리는 꽃비 같은 시의 세계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압축된 언어로 어느 한순간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여 전하는 기호의 세계이다.
때론 짧고 간결한 언어가 가슴을 후비고, 화려하지 않은 색이 더 깊이 마음에 스며든다. 하이쿠의 시 세계는 그런 미의식을 추구한 세계다. 불교의 선문답 화두처럼 풍덩 하고 마음의 호수에 돌멩이를 하나 던진 파문, 그 넘실한 잔물결이 한없는 감동으로 번져가는 하이쿠 하나를 접하면 글을 쓰는 사람은 그 매력에 푹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로코가 냉이꽃 내음을 맡는다. 여기저기에서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하이쿠 한 구절이 포개진다.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고바야시 잇사
오늘은 노을도 없이 하루해가 진다. 이 자리에서 바라본 노을이 가슴 저미도록 아름다웠던 날도 많았다. 앞산 등성이 꿈틀 꿈들 진회색 빛 먹구름 속으로 짐승처럼 기어든다. 잠재했던 고름처럼 피곤했던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살아난다. 로고와 산책하고 집으로 기어드는 발걸음이 기억하는 하루는 먹빛으로 무겁지 않았다.
단지 오늘 나는 하이쿠처럼 압축해서 가볍게 먹었으면 싶었으나 그렇지 못했다. 이것저것 위 주머니에 넣어서 소화가 부담스러웠다.
하늘하늘한 산호빛 꽃잎으로 봄꽃이 매일 화사하게 만발해도 짙은 잿빛으로 고요한 날이 하루쯤 있다. 아기가 주먹을 꼭 쥔듯한 꽃송이 때의 침묵을 기억하며 봄날의 짧은 하루가 잿빛으로 고요하게 저문다. 이미 활짝 핀 목련이 순백의 나팔을 회색빛 하늘로 올리고 침묵한다.
고달프구나, 생사는 본래 고통만은 아니니
연화장 떠도는 세계는 넓기도 하네.
- 삼국유사
지난날 나는 서툰 솜씨로 목련의 순백을 외쳤었다.
넓고 고요해서 더 아름다운 순백이 있는 줄 모르고.
찌르르 찌르. 새소리 가까이 들린다.
새소리 고요를 깬다. 아직 연두색 이파리 하나 내지 못한 나뭇가지에 봄물 오른다. 삶이 서로 닮은 생판 남이 아닐듯한 사람들이 지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