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말. 가을비가 와락 와닿는다
오랜만에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싫지 않다.
'쓸모없는 가을비'라고 했던가. 시멘트를 밟고 사는 도시 사람들에겐 크게 와닿지 않는 말일지 모른다.
어느 해 가을이 생각난다. 해마다 사과를 사러 들리는 과수원이 있었다. 그 집 사과는 다른 집 사과보다 늦게 여물었지만, 때깔이 좋고 과육의 밀도가 높아서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물기 많은 노란 살의 식감이 사각사각 일품이었다.
사과나무를 베기 전 해였으리라. 그 해는 사과빛이 유달리 이쁘지 않았다.
"수확철에 비가 오지 않아야 이쁘게 착색이 되고 맛도 깊게 드는데... "
저울에 사과를 달아서 주시는 할아버지의 후한 인심에 배어있는 쓸쓸한 표정이 읽혔다.
다음 해 그 사과밭은 인삼밭으로 변했다.
빗줄기가 듣는 사이 잠깐 우산을 받치고 강아지를 데리고 나왔다. 아파트 조경으로 심은 모과나무 열매에 물방울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다. 입추 지난 지 오래다. 인간의 근원적 고독이 더 느껴지는 가을..
좀 있으면 모과나무는 농익은 향기를 전해주라라.
가을비.
성숙한 바람을 들녘에 풀어놓고, 지난 계절의 모든 근심을 쓸어갔으면 좋겠다.
가을날ㅡ마이너 라이어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