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철엔
아름답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정교한 거미집이 유달리 많이
눈에 띄네요.
해충을 없애는 이로운 벌레.
무는 일이 거의 없는 익충.
거미의 기도/ 햇쌀
왕벚나무와 모과나무 사이 허공에
속 비운 속을 짓고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놀고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소화하고
스스로 신앙하고픈
거미 되어
슬픈 건지 설레는 건지 아픈 건지
제 시간을 잊은 듯 꼼짝하지 못했다.
어느 거미에게 쓰는 편지 /. 이해인
엊그제 꿈에는 나비를 보았고
어제는 성모상이 있는
예쁜 산책길에서 우연히 너를 보았어
우아한 연둣빛 옷을 걸친 네가
은실로 엮인 넓은 집에
조용히 엎디어 있었지
안녕? 인사하니 흠칫 놀라
위치를 바꾸는데
나는 다가가 사진을 찍었지
여기저기 꽃밭의 꽃들을 찾아
날아다니는 나비들만 많이 보다
성모상 나무 옆 고즈넉한 자리에
숨어 있는 너를 하마터면 못 볼 뻔했네
앞으로도 다시 보고 싶은 고운 거미야
한 번 보도 돌아선 게 아쉬워
처음 만난 몇 시간 후에 다시 가보고
오늘도 오전 오후 다시 가보았지만
너는 꼼짝없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붙어 있었지
정주 서원을 하고 일생을
수도원에 살고 있는 나에게
오늘 너는 정주의 의미를
몸으로 말하고 있었지
직접 눈을 마주치진 못했지만
마음으로 깊이 알아들었어
어쩌면 그리도 가늘게 실을 뿜어내
넓고 둥근 집을 지을 수 있는 건지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일상의 집도 그렇게 짓고 싶네
정성 들여 섬세한 사랑으로 말이야
이 세상 누구도 내치지 않는
넓고 밝은 우정 속에
비단실 같이 연결된 그리움으로
시의 집을 짓고 싶네
말없이 말을 해준
연둣빛 거미야 참 고마웠어
언제나 너의 집에 있어주길 바라
우리 또 만나자.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