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실레마을

순한 숟가락

by 햇쌀

아버지는 음복례 술이 들어가면서부터는 말이 많아진다. 그때부터 내 불안은 싹을 틔우기 시작해, 칡넝쿨을 이룬다. 술이라는 것이 왜 세상에 있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엄마의 한숨이 나오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묘하러 산에 올라갈 때와 달리 내려올 때는 눈치를 살피게 된다.

금병산을 내려와 오춘 댁에 들려, 아버지는 또 약주상을 받는다. 그리고 농수로 길을 따라 큰 고모댁으로 가서 다시 술상을 받는다.

아버지의 젓가락 장단과 나지막해서 애달픈 노래는 어둑할 때까지 이어졌다. 아버지 세대를 생각해보면, 그 술상에는 삶의 회한과 슬픔과 애착 같은 것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으리라.

일제 강점기 고향마을 실레. 낯선 고샅길을 더듬어 본다. 닭싸움을 붙이던 점순네 마당을 지나니, 암울하고 노골적인 장면들이 스친다. 남편의 노름 빛에 몸 파는 아내, 알코올 중독 남편의 가정폭력, 일제의 악랄한 수탈에 허탈한 상황에 처한 콩밭, 도둑질을 권하는 만무방, 혼수품 농간을 치고 본 남편과 도망치는 술집 작부.

더 깊숙이 들어가니 안쓰러워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아내의 매춘을 권하는 소낙비. 병든 아내를 지게에 짊어지고 장기를 돈으로 계산하는 인생 따라지의 땡볕. 요절한 선생의 처절한 해학과 풍자가 심금을 울린다.

가끔씩 나오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조각 맞추어 보면, 금병산 기슭에 있던 옛집 풍경은 이랬다.

지붕에는 박 잎이 너울거리고, 밭에는 옥수수와 감자알이 익어갔다. 마당에는 노란 병아리가 어미닭을 쫒고, 복숭아꽃 살구꽃이 만발했다. 때마침 꽃잎이 바람에 하얗게 흩날리면, 새참으로 가져온 생강나무 전과 국시에 꽃잎이 내려앉는다. 아버지는 꽃잎 채 국시 국물을 들이켰다. 계절이 뒤엉킨 기억 속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고향을 추억할 때면, 나는 실눈을 뜨고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 속 배경이 된 주인공과 점순네 집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실레(떡시루 라는 뜻). 나는 얼마나 행복한 시대를 살았던가. 단골로 등장하는 여주인공 이름 점순이. <봄봄>의 점순네 집이 있을 법한 마을길을 지나, 늙은 느티나무가 있는 쪽으로 간다. 나무 아래 평상에서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둔다. 역 앞 구멍가게 주인 가희 아저씨가 손짓하여 어린 나를 부른다. 알사탕을 주기 위해서다.

시내버스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와 간이역 앞에 멈춘다. 덜컹대는 버스에서 멀미를 심하게 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은 알사탕을 물었어도 아버지의 술 냄새에 울컥했다. 그러나 아무리 술에 취해도 아버지는 성묘 갈 때 가져가는 지직(돗자리의 강원도 사투리)을 잊지 않았다. 지직을 옆구리에 낀 아버지가 눈에 삼삼하게 다가온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흙의 숨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