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목련나무를 만나
가지 끝에 핀 그리움 숨겨두었다가
그대 오는 시간
슬며시 꺼내 보이면
무심한 그대 지나가 버리고
창백해진 얼굴 보이기 싫어
고개를 떨군다
꽃송이에 품은 나의 고백은
빛바랜 편지되어
땅 위에 나뒹굴고
까맣게 타들어 간
그리움은 바람에도
미동이 없다
길을 걷다 목련나무를 만나
나는 가슴앓이 시인이 되었다가
나는 어여쁜 꽃송이가 되고
나는 향기 잃은 꽃잎이 되었다가
나는 널브러진 그리움이 된다
노란 작은 벽등만 켜져 있는 어둑한 침실. 시계가 새벽 4시를 가리키고 그녀의 침대 밑으로 2분마다 지하철이 지난 간다. 달팽이관이 문제가 생긴 건지 이석증 때문인지 '웅' 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침대에서 일어나 내딛는 발바닥이 무겁게 느껴진다. 그녀의 미간에 십일 자 주름이 순간 잡혔다. 어젯밤 먹은 라면국물 때문인지 부은 건지 몰라도 피부가 버석버석하다. 그녀는 늘어 뜨러진 긴 머리를 돌돌 말아 정수리에 묶어 올린다. 동그란 거울 한가운데 새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는 엔틱 청동 거울 속의 모습을 빤히 바라본다. 마스크 자국 속에 피부 트러블이 심란하다. 잠자기 전에 연고를 바르고 잤건만 트러블이 오늘도 그대로다. 그녀는 너무 집에서만 있어서일까 생각을 하다가 주섬주섬 외출을 준비한다
집 밖으로 나오자 햇살에 눈이 부셔 그녀가 모자를 꾹 눌러쓴다. 햇살이 좋아질수록 1층에 사는 그녀의 집이 어둡다는 걸 느낀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1인용 한 줄짜리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이런 날은 실내보다는 햇빛 따듯한 거리를 걷는 것이 좋다고 그녀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거리라면, 종로길이다. 첫눈이 내린다고 만나고 비가 온다고 만다던 약속 장소였다.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자신이 떠올랐다. 집에서 그녀가 버스를 타고 종로로 향하는 그 길은 언제나 설렘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나 명절 때면 그녀는 언제나 종로에 있었다.
극장이 모여 있는 종로에는 개봉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고 종로길 가판대에서는 언제나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흘러나왔었다. 그녀에게 종로는 그저 걷기만 해도 즐거운 거리였다. 그녀는 중학교와 이사 간 고등학교가 있던 종로가 가끔 그리워진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녀는 중학교 친구인 선영이와 인사동 길을 지나 종각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었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그녀는 선영이와 햄버거집 2층 창가에서 바라보던 길이 생각이 난다. 종로는 대형서점도 있고, 큰 절도 있고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참 많아서 좋았다. 게다가 종로에는 결혼 전까지 다니던 회사가 있던 인사동길이 있다.
그녀는 인사동으로 가고 있다. 인사동은 종로 2가와 종로 3가 사이에 있다. 그 길은 그녀가 특히 좋아했던 길이다. 역에서 나와 20미터 정도 직진을 하면 추억의 M햄버거집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라지고 다른 것이 들어오려고 하는지 공사 중이었다. 몇십년을 종로길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없어진 간판이 아쉬웠다. 길을 건너 탑골 공원 사잇길로 직진을 한 면 인사동길이 나타난다. 오랜만에 들린 인사동 길은 마침 사람들이 적어 한산했다. 결혼 전 몇 년 동안 다니던 회사가 있던 곳, 보이는 건물마다 그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났다. 점심시간이면 우르르 줄을 서서 먹던 골목 만두집도 생각이 났다. 회사가 인사동이었던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땐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퇴근하면서 보이는 것이 다 작품이고 좋은 풍경이었다. 그녀에게 인사동은 어떤 날이든, 어느 곳이든 네모난 액자 안에 들어가면 풍경이 되고 작품이 될 것 같았다.
걷다 보니 그녀의 눈에 익숙한 전통찻집이 보인다. 혼자 들어가서 마실까 말까 싶어 하다가 아쉬움을 안고 지나간다. 그녀는 비라도 내렸다면 보약 같은 쌍화차 한잔을 마실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쌍화차에 노른자 띄운 것을 그렇게 맛있어했다. 어릴 적에 엄마를 따라 재래시장을 가면 엄마와 마시던 그때의 쌍화차가 참 달달하고 맛있었다. 몇 년 전에도 인사동 찻집에서 그녀와 엄마가 쌍화차를 마셨었다. 엄마의 카톡 사진은 아직도 그날 찻집에서 그녀가 찍어 드렸던 곱게 웃으시던 모습이다. 문득 병원에 계시는 엄마가 떠 올라 그녀가 숨을 한번 깊게 내쉰다.
조금 더 걸어가다 그녀가 오래된 필방 앞에 선다. 그녀는 마스크 안으로도 먹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먹을 갈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붓을 떠올리면 먹 냄새를 느낀다. 그녀가 이것저것 이프로 부족하게 배워 놓은 것이 있다면 늘 미루어 놓았던 것은 수묵화와 민화였다. 하얀 화선지 위에 검은 먹물이 번지는 모습을 그녀는 좋아했었다. 거기에 여백을 채우는 색깔들이 들어가는 수묵화를 보고 있으면 그녀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묵화가 부드럽고 단정해서 좋다면 민화는 화려하고 기원 바람의 의미가 느껴져 좋아한다. 필방을 둘러보다 그녀가 붓과 민화책과 커다란 부채 하나를 사서 나온다. 채색을 할 수 있는 화선지가 붙어 있는 부채다. 집에 가서 부채에 색을 입히고 물 번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 같다.
그녀의 중학교가 보이는 인사동 끝에서 학교 교문이 보였다. 깔깔거리며 나오던 그녀와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잠시 이름이 바뀐 빵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발길을 돌린다. 그녀가 다시 지하철역으로 간다. 식사 준비를 해야 할 생각에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래도 좋아하는 물건들이 가방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뜨거운 햇살도 마냥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