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작은 아이의 기말고사 날 아침, 아들이 형의 시계를 찾았다. 아이에게 시계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은 시간의 아쉬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기에 반가운 일이다. 큰아이의 시계를 빌려주려고 보니 시간이 늦게 가고 있었다. 시계의 약을 갈기 위해 시계방에 들고 갔다. 그런데 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장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시계는 일정한 간격으로 시간을 움직여 주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에 연속적으로 늦어지면 탈이 난 것이다. 시계 안에는 일정한 시간을 움직이는 것을 담당하는 탈진기라고 하는 장치가 있다. 이 장치가 진자처럼 규칙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이 탈진기의 작동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오랫동안 큰 아이와 한참을 함께했던 시계가 결국 느려지기 시작했다. 번아웃이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큰아이처럼 쉼 없이 열심히 움직이던 시계도 시간을 등지고 걸어가나 보다. 급한 대로 둘째 아이의 수능시계를 미리 사 왔다. 하얀 바탕에 선명하게 보이는 까만 초침은 아이의 시선을 편하게 해 줄 것 같았다.
큰아이의 시계는 하얀색 스포츠 시계이다. 7년 전 남편의 해외 출장 때 고1이었던 큰아이 선물로 사 온 것이다. 남편이 아들을 위해 물건을 고르고 사온 첫 선물이라서일까 오래도록 아들은 유독 그 시계를 좋아했다. 시계는 장난감과는 또 다른 아들의 귀중품이 된 것 같다. 귀하고 소중한 물건이 귀중품이니 아들에게는 내내 소중한 물건으로 팔목에서 한몫을 했다. 아들의 시계는 여간 부지런하지 않았다.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멋지게 만들어주는 것이 시계라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그야말로 애착 시계가 되었다. 큰아이는 대학에 입학하고도 낡아서 몇 번이나 밴드가 헐거워져 꿰매 준 그 시계를 좋아했다. 너무 많이 끼어서 고무가 찢어지는 부분이 생기면 하얀색 실로 슬쩍 꿰매어 주었는데 궁색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아했다. 그것은 정 많은 아들이 물건에도 정이 생긴 까닭인 것을 안다.
몇 년 전, 큰아이의 시계가 주춤했던 그해는 아들도 모든 활동을 멈췄다. 그건 청천벽력처럼 다가오는 일이었고 아들과 아들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평범히 돌아가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 지 느꼈다. 아침이면 아이가 학교를 가고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하루가 그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처럼 시간이 더딘 적이 있었을까. 하루 종일 시계는 늘어져 있었고 세상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축 늘어진 세계 같았다. 때로는 현실이 아니기를, 깊은 꿈을 꾸고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큰아이가 스스로가 만든 동굴에서 나왔을 때 비로소 아이의 시계 초침은 다시 움직였다. 큰아이의 팔목에 하얀 스포츠 시계가 끼워지는 날이면 나는 그것 만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공부에 관심이 적었던 작은 아이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멈추어 있는 것 같은 세상에서 시계의 초침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둘째 아이의 걸음이 빨라졌을 때 나의 마음이 급해졌다. 어쩌다 느려진 모습이 보이는 날이면 태엽을 감아 돌리는 시계처럼 움직이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늦은 밤에야 잠든 아이를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똑같은 상황을 이야기한다면 기다려 주라며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엄마처럼 말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욕심이 생기는 순간 나 역시 아이의 공부에 자유롭지 못했다. 간신히 걸음마를 하고 있는 아이에게 뛰기를 바라는 마음을 마주한 나를 보면서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움직이기만을, 걸으면 걷기만을 바라던 마음을 또 잊고 있었다.
나의 시계는 잘 돌아가고 있을까, 내가 생각했던 하루였을까, 잘 보낸 한주였고 한 달이었을까, 마스크 속에 가려진 얼굴이 거울에 비칠 때마다 흐트러진 나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베란다에는 배달 박스가 쌓이고 쉬운 것에 익숙해지면서 애써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았던 한 해였다. 시기가 그래서 그렇다며 나에게 부지런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을 주며 지냈던 것 같다. 큰아이 때의 나와 작은아이 때의 나는 확연히 다르다. 잠시도 누워 있지 않던 열정 많은 엄마였다면 지금의 나는 잠도 많아지고 허용이 많아진 엄마가 되었다. 작은 아이를 위해서라며 한 발자국 떨어져 있다는 핑계로 아이의 공부에서도 무관심했다. 아이와 부딪히기 싫어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었으면서도 아이가 알아서 열심히 하기만을 바랬고 결과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부끄러운 엄마이다.
안방에 걸려 있는 엔틱시계의 초침처럼 나의 시계는 느릿느릿 왈츠를 타듯 흘렀다. 아이들의 시간에 맞추어져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용기 없는 내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나에게서 조금씩 독립을 하고 있다. 가족의 시계는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의 시간에 맞추어져 있었다고 생각했었는 데 이제는 각자의 시계를 보고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돌아보면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나 보다. 가족들의 시계가 변하듯 이제는 나의 시계도 속도를 내어야 할 것 같다. 주저앉아 있던 시간을 끌어 나의 세계에서 움직여주어야 한다. 우리 집이라는 커다란 시계 안에서 네 개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면서 멈추지 않기를.
가장 조용한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큰아이의 기분 좋은 노랫소리가 들린다. 둘째 아이는 멀리 이사 간 친구와 밤새 게임을 하고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며 이불을 덮어주는 데 잠결에도 엄마 사랑해라고 말해준다. 달달한 커피 두 잔을 탔다. 여느 날처럼, 남편과 못 본 드라마가 없을까 채널을 돌린다. 이 집에서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익숙함과의 작별은 쉽지 않았는 데 마음도 단련이 되나보다.
거실을 둘러보며 사방을 눈에 담는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던 1층 베란다 밖의 나무도 이제는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한다. 시계의 초침이 계속 돌아가는 것처럼 나무의 모습도 계속 변하면서 나이 들것이다. 누군가 저 나무의 초록빛에 웃음 짓고 떨어진 노란 잎에 쓸쓸한 계절을 맞겠지.
그래도 어제와 같은 오늘이라서 감사하다. 축복 많은 오늘에 기대어 소망한다. 무심한 하루하루라도 그저 무탈한 한 해가 되어주기를, 그리고 우리들의 시간이 조용히 흘러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