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 삼각산 골짜기 산세 높은 곳, 비뚤 삐뚤 휘어진 어머니의 척추 같은 산길을 오른다. 40년 전 백운계곡에 발 담그며 놀던 열 살 꼬마의 웃음이 파노라마처럼 따라온다. 친정어머니를 따라온 열 살 꼬마가 이제는 그때의 어머니의 나이를 훌쩍 넘겨버린 어른이 되었으니 시간은 흘러가는 구름과 같고 햇살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더딘 듯 빠르다. 부처님이 오시는 날이나 음력 초하루가 되면 어머니는 늘 나를 데리고 삼각산 도선사에 오셨다. 어린 나는 공양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맛을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야 예전의 절밥은 싱거운 음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짠지가 반찬이라서 내게는 짭자름한 음식이었다. 나는 도선사에서 먹는 공양밥이 좋았다. 식당 안에 들어서면 늘 배어있는 특유의 된장국 냄새가 있었다. 그런데 그 맛이 주기를 타면서 생각이 났다. 특히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어찌나 그 맛이 생각이 나는지 혼자 와서 먹곤 했다. 도선사에 도착하면 식당부터 가서 허기를 달랬다. 식욕도 욕심이라면 줄여야겠지만 공양밥 또한 부처님의 은혜이시다 내 맘대로 생각하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공양을 받고 나오면 건물 2층에 문수보살님이 모셔 있는데 합장하며 감사히 잘 먹었다고 인사를 드린다. 사실은 공양받는 곳 위에 문수보살님이 계신 줄은 몇십 년 동안 알지 못했다. 알게 된 것이 큰아이의 수능기도를 드리러 다니면서였다.
이 높은 삼각산을 오르기 위해 우이 계곡을 따라 걷다 쉬다 하늘을 보시며 숨을 돌리시고 다시 오르셨을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능이 있는 11월이면 가는 곳마다 간절한 기도의 마음이 절절하다. 친정어머니도 우리 삼남매의 입시 때마다 기도를 다니셨다. 내가 어머니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엄마가 되기 전까지 친정어머니의 수고스러움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미처 몰랐다. 큰애가 입시를 치르던 사 년 전.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사람이 간절해지면 무엇 하나도 쉽게 볼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것 같았다. 몰아치는 비와 발이 푹푹 빠지게 쌓인 눈길에 차량이 통제되어도 도선사로 올라오는 어머니들의 간절한 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무척이나 추었던 그해 겨울은 두꺼운 덧버선을 세 겹을 겹쳐 신어도 발가락이 얼 것 같은 한파였다. 그래도 백팔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리고 아홉 시간을 탄다는 엄지 손가락 두께의 향을 피울 때면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엄마가 되어 있었다. 살을 에이듯 차가운 한파에도 비닐을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수험생 어머니들은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삼각산 도선사까지는 오고 가고 네 시간이 걸린다. 나는 집이 멀어서 매일은 가지 못했지만 자주 가다 보니 얼굴이 익혀지는 분들이 계셨다. 그분들 중에는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도 계셨는데 손주들을 위해 날마다 산을 오르신다고 하셨다. 불경을 막힘없이 줄줄 외우시는 것을 보면 오랜 시간 사랑으로 하는 기도의 힘이 가늠되곤 했다. 나는 다라니경 하나도 간신히 외울 듯 말듯했는데 불경을 외우며 기도하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뵐 때면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감동을 받는다. 친정어머니도 거동만 불편하지 않으셨다면 손주를 위한 기도를 위해 날마다 오르셨을 것을 안다.
도선사 입구에 들어오면 오른쪽에 청동불상인 지장보살을 뵌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지장보살 또한 알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아쉬울 때만 찾으니 죄송한 마음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인데 지옥문을 깨트린다는 석장인 육환장과 어둠을 밝히는 보석 구슬인 장상명주를 들고 있다. 어느 날 함께 수능기도를 다니던 친한 언니가 가던 길을 멈추고 지장보살 앞의 낙엽을 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언니는 두 아이의 수험생 어머니였는데 도선사를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기도를 다녔다. 그러다 보니 자주뵈는 어르신들을 알게 되었고 어르신들은 언니를 반갑게 맞아주셨었다. 30년을 다녔지만 아무하고도 소통을 안 하고 공양도 혼자 먹고 다니던 나는 언니 옆에 있으면 처음 온 신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폭설로 눈이 쌓여 차량이 운행되지 못했던 날도 다친 다리로 한 시간을 올라왔던 언니의 모습이 생생하다. 차가운 날씨에 두 볼은 붉어지고 발목까지 눈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날의 언니의 모습에 불심이란 것은 시간과 정비례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꾀부리는 불자는 진심을 다하는 언니의 모습에 반성이 되고 자극이 되었다. 참 우스운 것은 기도도 함께하다 보면 불심이 부족한 것 같은 마음에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다는 것이다. 언니는 다라니경도 당연히 줄줄 외우고 반야심경도 외워서 기도를 하는데 나는 완벽하게 외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살짝 주눅이 들 때도 있지만 이 불심 가득한 언니와 함께함이 감사했다. 심지가 곧은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선행은 물이 드나 보다. 어느새 나 또한 지장보살 앞의 낙엽을 치우고 있었다. 살면서 무언가를 먼저 나서서 하는 것이 나에겐 쉽지 않았다. 맨 앞자리보다 뒷자리가 편하고 기둥 뒤가 좋을 때도 있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것이 편했다. 고백하자면 오랜 세월 도선사를 오르면서도 항상 내 마음의 무게만을 덜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도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 애초부터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아쉬울 때만 찾아가지만 늘 반겨주시는 부처님들이 계신 곳, 도선사가 그곳에 있어서 좋다. 간절히 드리는 기도가 닿을 수 있도록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삼각산 도선사가 내게는 은신처이고 쉼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면 내어주던 하늘 구름 아래서 생각이 정리가 되고 다져지곤 했다. 언제나 "왔구나?" 하며 미소로 반겨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사람에게 선한 끝은 있고, 엄마의 기도가 신통력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믿고 싶은 날이면 주섬주섬 마음을 챙겨서 나설 것이다. 어디선가 조우할 어린 나와 현재의 내가 미소 짓게 되는 날을 생각한다. 그런 날이면 청량한 풍경소리가 바람을 타고, 나는 그 소리에 기대어 달달한 자판기 커피 한잔을 머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평온한 시간을 마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