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 일리아스 중에서
다가올 어려움, 고통, 위험 등이 빤히 보이는 데도 거절하자니 부끄럽고 수락하자니 두려운 순간들이 있다. 번거로움이나 귀찮음 정도라면 개인의 이성이나 양심 등을 꺼내어 혼자 도닥이며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알고 있으니 정도로 생각하며 수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존이나 생명의 위협, 가족의 안위 등과 직결되는 일에 부딪힌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또 그 선택의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되며 결과는 과연 예상하거나 기대한 대로 흘러갈까?
그리스와 트로이 전쟁, 혹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전쟁이라고도 일컫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고전, 일리아스에서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 전쟁의 명분은 헬레나였으나 그 명분의 미약함은 왕 중의 왕이라 일컫는 아가멤논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명분은 핑계일 뿐, 이미 딸까지 제물로 받치며 그리스 항을 떠나 트로이아에 다다른 아가멤논으로서는 이 전쟁을 승리로 가져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은 없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미약한 명분에 과정 또한 보잘것없이 세월만 흘러갔다. 세력이나 규모면에서는 그리스 연합군이 강력했으나 전쟁에서 공성보다는 수성이었다. 그리고 트로이아의 일리오스 성에는 프리아모스의 아들, 말을 길들이는 트로이아인들 중 가장 으뜸가는 전사 헥토르가 있었다.
- 그중에서 누구든 나와 싸우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이리 나와 그대들 전부를 대표하여 이 고귀한 헥토르와 싸우게 하시오. 만일 그자가 날이 긴 청동으로 나를 죽이면 무구들을 벗겨 속이 빈 함선들로 가져가되 나 자신은 집으로 돌려보내 트로이아인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죽은 나를 화장할 수 있게 하시오.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모두 말없이 잠자코 있었으니 거절하자니 부끄럽고 수락하자니 두려웠기 때문이다.
헥토르의 대담한 제안에 그리스 진중은 술렁이며 조용했다. 그러자 유약하나 공명심 강했던 메넬라오스가 제가 가겠다고 나섰다. 잔인하지만 리더의 자질 중 하나인 판단력은 누구보다 뛰어났던 아가멤논이 제지했다.
- 단순한 경쟁심에서 너보다 더 강한 전사와 싸우려 들지 마라. 프리아모스의 아들 헥토르는 다른 사람들도 꺼리는 터이며 너보다 훨씬 강한 아킬레우스조차도 남자의 영광을 높여주는 싸움터에서 그와 만나기를 두려워했다.
주춤거리며 뒤로 나앉은 메넬라오스 이후로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자 훌륭한 연설가이자 책략가였던 네스트로가 나섰다.
- 지금 당신들이 모두 헥토르 앞에서 몸을 사린다는 말을 들었다면 펠레우스 노인은 자신의 혼백이 사지를 떠나 하데스의 집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불사신들께 두 손 모아 간절히 빌었을 것이오. 그 옛날 퀼로스인들과 싸울 때처럼 나 또한 젊고 기력이 왕성했다면! 그러면 투구를 번쩍이는 헥토르도 당장 싸울 상대를 만났을 텐데. 하거늘 전 아카이오이족의 장수들인 그대들 중에서는 아무도 자진하여 헥토르와 맞서기를 원치 않는구려.
네스트로의 연설에 모두 아홉 명이 일어섰는데 그중 아이아스의 제비가 아가멤논의 투구 안에서 뽑혔다. 자랑스럽게 무구를 갖춰 입는 아이아스 뒤로 남은 자들의 기도 소리가 들렸다.
- 이데 산에서 다스리시시는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위대하신 아버지 제우스여! 아이아스에게 승리를 내리시어 그가 빼어난 명성을 얻게 해 주소서. 그러나 그대가 헥토르도 사랑하시고 염려하신다면 두 사람에게 똑같은 힘과 영광을 내려주소서.
헥토르 또한 이 전투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더 물러날 수도 없던 일로 하자고 할 수도 없었다.
- 그래서 두 사람이 동시에 긴 창을 손으로 뽑아 서로 마주 덤벼드니 그 모습이 마치 날고기를 먹는 사자들이나 그 힘이 결코 만만찮은 멧돼지들과 흡사했다.
- 그리하여 맷돌처럼 생긴 이 돌이 방패에 맞아 그것을 안으로 찢고 들어가며 그의 무릎을 내리치자 헥토르는 방패에 밀려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러나 아폴론이 얼른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서로 맞붙어 칼로 찔렀을 것이나 이때 제우스와 인간들의 사자들인 전령들이 달려 나왔다. 이들은 두 사람 사이에 홀을 내밀었고 슬기로운 계책을 알고 있는 전령 이다이오스가 이렇게 말했다.
- 자,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이제 전쟁과 전투를 중지하시오. 구름을 모으는 제우스께서는 두 분 다 사랑하시며 두 분 다 훌륭한 창수들이오. 이제 전쟁과 전투를 중지하시오. 벌써 밤이 다가왔으니 밤에게 복종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전령은 두 사람의 자존심을 살려주며 전투를 끝내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 방법에 헥토르와 아이아스 둘 다 자신의 무구를 서로 건네주며 한 사람은 아카이오이족 백성들에게로, 한 사람은 트로이아인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며 전투는 끝이 났다.
그 전투에 나선 것은 아이아스였으나 그런 아이아스를 지켜보는 다른 그리스 왕들의 마음속에도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으리라. 나는 할 수 없거나 하기 싫지만, 누군가 해주면 감사하겠지만 그 또한 강요할 수는 없으니 ‘아이아스의 자의’ 였다고 믿고 싶은 것 또한 수락하지 못한 사람들의 자기 위안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거절하자니 부끄럽고 수락하자니 두려운 순간이 온다면 나에게 이 일로 인한 부끄러움이 더 큰지, 두려움이 더 큰지를 따져 볼 것이다. 능력이 안 된다면, 내가 나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면 기꺼이 부끄러움을 택해야 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두려움에 맞서보려 한다.
그리고 누군가 수락해서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돌아올 수 있는 퇴로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나아갈 때도 물론이지만 뒤돌아 올 때도 결과와 상관없이 그 행동을 격려해 주어야 한다. 가장 나쁜 일은 부끄러워하며 거절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수락해서 나선 사람을 향해 이러저러한 훈수와 충고를 하는 일이다.
자, 이제 나의 눈앞에 구순 노모를 보필하는 일이 나타났다. 여러 형제 중 누가 나설 것인가? 이러저러한 사연과 단계를 지나 이제는 정말 누군가는 옆에 있어야 할 시간에 오고야 말았다. 거절하자니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지 않는 것 같아 부끄럽고 수락하자니 나의 시간이 모두 사라질 것 같아 두렵다.
내가 책을 읽을 때 책 그만 보고 어서 자라고 하시던 엄마, 책 읽어봐라 밥이 나오나를 외치던 엄마에게 내가 나서 보려 한다. 그리고 얼마 드시지도 못하는 미음같은 밥 반 그릇을 차려 내며 말해 보려 한다.
- 책 읽었더니 엄마 밥이 나왔네!
라고. 그리고 부디 이 수락에 모양 빠지지 않는 퇴로가 있길 뒤에 남은 자들에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