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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준원 Sep 02. 2020

EP2.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배울 수 없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학교 배정을 받을 시기였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99%가 진학하는 중학교에서 추첨 배정은 살 떨리는 순간일 수밖에 없다. 당시 고등학교는 각 학교마다 앞머리의 규율이 상당했다. 9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으니 두발 자유화는 없었던 시절이다. 한참 외모에 신경 쓸 나이에 어차피 짧은 머리지만, 1cm라도 더 긴 앞머리를 허락하는 학교로 배정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체벌이 너무 심해 피하고 싶은 학교가 존재했다. 모두가 기피하는 S고는 다니던 한 반에서 대략 6명 정도가 배정받았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학교 배정을 받는 날이 다가왔다. 한 명씩 담임 교사의 부름에 학교 배정표를 받고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그 6명 중에 2번째로 나의 이름이 불렸다. 종이에는 다름 아닌 S고로 배정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잿빛의 얼굴을 보고 환호했고, 나는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서 허탈함을 느끼고, 배정표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 해에는 한 반에서 20명에 가까운 학생이 같은 S고로 배정을 받았다. 모두 참담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입대하듯이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하는 날이 나가왔다.

동네에는 오래된 이발소가 있다. 학교 배정을 받았으니 규칙에 맞게 머리를 깎아야 하는 시기에 아이들이 몰린다. 자리에 앉으면 각자가 배정된 학교의 이름을 이발사에게 알려준다. 이발사는 학교의 이름을 들으면 이발기를 들고 학교 교칙에 맞는 크기의 보조 기구를 끼워 넣는다. 앞머리 3센티미터의 교칙. 이 정도 앞머리라면 거의 윗머리는 1밀리미터 수준으로 하얀 두피가 보일 정도다.


내가 배정된 학교의 이름을 부르는 아이들은 힘이 없다. 그 외 학교의 이름을 부르는 아이들은 무언가 기운이 넘친다. 자랑스러운 건가 아니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안심일까.


머리를 깎는 동안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며 이질감을 느낀다. '넌 도대체 누구냐' 난생처음 앞머리 3센티미터라는 패션에 어색함을 느낀다. 바닥에 깎여 수북이 쌓인 나의 머리카락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가발 만드는 곳에 팔면 어땠을까 생각도 들었다.

고등학교 입학 전의 마지막 중학생의 겨울 방학은 학업 준비에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머니와 함께 학교 행정 사무실을 방문하여 입학금과 입학 전 처리해야 할 과제를 받았다.


처음 교정을 방문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대학교를 연상케 하는 건물로 올라가는 교정이 참 멋있었다. 하지만 그런 풍경의 놀라움은 잠시 건물을 보며 다른 놀라움으로 변질되었다. 교실의 창문마다 밖으로 뻗어 있는 석탄 난로를 사용한다는 플라스틱 통로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중학교에서도 전기난로였는데 석탄 난로라니..'


아직 추운 겨울에 교실에서 수업을 받지 않아서일까. 놀라움은 분노로 바뀌지 않았고, 학교 건물이 별로라는 느낌만 가득했다. 나의 관심은 건물의 풍경보다는 방학 숙제의 분량에 있었다. 학교를 방문하기 전에 이미 악명 높은 예비 입학생을 위한 방학 숙제가 어마 무시하다는 소리를 들어서였다. 그 방학 숙제는 바로 천자문 15번 쓰기였다.


한자를 15000자를 쓰려면 한자 노트 4권은 족히 필요했다. 학교의 체벌도 심하여 겨울 방학의 숙제를 완료하지 못하면 완료하는 시점까지 수차례 체벌을 당한다는 고압적인 학교였다. 그래서 학부모들이 그렇게 좋아했나. 때려서라도 공부를 하게 만들어 상위권 대학을 보내니 말이다. 지금은 체벌이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 시절에는 체벌이 용납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천자문 쓰기는 15번에서 10번으로 과제는 줄었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운 숙제였다.


천자문 10번 쓰기, 국어와 수학 선행 학습 숙제를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혹시라도 완료하지 못해서 허벅지가 터지도록 체벌을 당하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불안과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는 등교 시간도 상당히 빨랐고, 타 학교에 비해 30분 일찍 등교하는 학교여서 더욱 긴장했다.

새벽 6시에 첫 등교에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아직 까만 하늘이 긴장과 뿌듯함을 안겨주기도 했다. 한가득 책을 가방에 넣고 학교를 향해 가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만 않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지만, 적응하기까지 고통은 늘 뒤따라오니까. 어떤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받는지, 교사는 어떤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잘할 수 있을지 스스로 믿지 못했다.


처음 교실로 들어가는 순간에 정적이 흘렀다. 서로 눈치를 보며 어떤 성향을 가진 아이들이 모였는지 약간의 기싸움이 맴돌았다. 중학교 시기만 하더라도 동네 친구들이 많았지만 고등학교는 여러 지역에서 모인 중학교 출신이 섞여 있어서 일단은 같은 중학교 출신끼리 모이게 되어 있었다. 그래도 크게 무리 없이 조용하게 학기를 보냈다.


중학교 시절에만 하더라도 반장 선거를 분명 학기 초반에 했는데 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별로 이상하다는 낌새는 채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런데 담임 교사와 면담에서 왜 그런지 실체를 알게 되었다. 매일 한 명씩 방과 후에 남아서 담임 교사와 면담을 진행했다. 꽤 시일이 지나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담임은 학생 기록부를 찬찬히 살펴보며 공부를 조금만 잘했어도 반장이었을 텐데 아쉽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 직장과 성적이 적당하면 반장을 한다는 이상한 말을 처음 듣고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지만 면담에서 나온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 실감하는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어느 날 방과 후 학원을 방문하고 집에 도착해서 9시 뉴스를 보는 아버지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이름을 크게 부르는 아버지에게 다가갔을 때, 아버지는 화면을 가리키며 뉴스에 나오는 학교가 네가 다니는 학교가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다. 매우 눈에 익은 여러 교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네. 맞아요. 저희 수학과 영어 교사에요. 저분들 왜 저기 있어요?"


그 방송에서는 교사들이 학교의 비리를 참을 수 없어 양심선언했다고 자막이 나왔다. 양심선언이 무엇일까. 그건 다름 아닌 교장의 부패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학교에 학생회도 존재하지 않았고, 반장과 부반장은 담임 교사가 지정했고, 그들은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대략 반장은 100만 원, 부반장은 50만 원의 육성회비를 강요받았다. 그제서야 아버지의 직업과 성적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면 반장과 부반장으로 임명하는 시스템을 알게 되었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다수의 교사가 양심선언으로 학교의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빈 수업 시간은 자율 학습으로 시간을 보냈다. 어린 마음에 5교시까지만 진행하고 집에 오는 길이 너무나 즐거웠다. 교장의 비리가 그토록 심한지 알지 못했다. 교장은 학교 비리로 200평의 주택과 대리석으로 장만한 지하를 비롯해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두 명의 자녀는 해외 유학을 떠난 상태였다. 교장직에서 박탈당하고 교도소로 형벌을 받아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른 교장이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학교에서는 교장을 옹호하는 교사와 그렇지 않은 교사 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학생들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학교의 비리로 어수선한 가운데 교사들은 보란 듯이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 수가 다수 있어야 비리에도 건재하다는 체면을 챙길 수 있다고 학습을 강행했다.

한 학년에 천명이 존재하는 학교에서 전교 등수가 하락하는 수치만큼 체벌을 가하는 교사도 존재했고, 프린트물을 나눠주고 자신이 질문하고 대답하지 못하면 언제나 회초리로 손을 가격하는 교사도 있었다. 체벌이 아주 당연시되던 시기였다. 점심시간 이후의 첫 시간은 졸음이 쏟아지는 시간대다. 식곤증이 몰려와도 자신의 수업에 집중해야 하고, 잠시라도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면 각목을 들고 와 체벌하는 교사도 있었다.


학생의 인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맞으면 맞는 대로 나중에 나도 갚아주겠다는 복수심만 가득했다. 교사라는 공권력을 앞세워 학생의 안위와 표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질풍노도 시기의 학생들이 어긋나지 않도록 강압적인 방침이 학교 교칙으로 작용했다. 과연 우리는 학교에서 자신의 주장을 전혀 할 수 없는 교육을 받으며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었을까. 그런 세대가 이제 40대를 지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변화하는 사회 현상에 적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여전히 세대 간의 갈등을 '라떼는 말이야'로 꼰대식 마인드로 점철된 사람도 존재한다.


이제는 학생의 두발 자유화에서부터 그들의 전문성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지 고민하는 학생의 인권을 생각하는 교육이 자리 잡았으면 한다. 교육 시스템도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그렇지 못한 모범생처럼 말 잘 듣는 학생을 선호하는 교육에서 창의성은 향상된다고 보기 어렵다. 이제는 교육의 전반적인 학습 내용이 교사 중심이 아닌 학생의 능력에 맞춘 적절한 보호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에세이 #학교에서민주주의를배울수없었다 #고등학교 #학교비리 #양심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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