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독서법>
어린 시절 나는 책을 읽지 않았다. 책장을 가득 채운 문학 전집은 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질려버렸다. 잠깐 동안 '영웅문'이라는 무협지와 '삼국지'에 빠져 지내는 시기 외에 책을 곁에 두지 않았다. 독서가 취미라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었고, 너무나 고상한 취미라 생각했다.
그런데 중년의 나이가 되고 독서가 왜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생존 독서'였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누구보다 먼저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능력은 모두 독서에 나오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생존 독서였지만, 심리학에서 뿌리내린 독서 분야는 점차 진화생물학, 뇌과학에 이어 역사와 경제경영, 그리고 인문학으로 분야가 넓어졌다. '내 마음이 왜 이럴까'라는 물음에 답을 찾으려고 시작한 생존 독서가 어느덧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재미라는 느낌까지 도달했다.
"책이 재미있는가?"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확신에 찬 대답은 아닐지라도 '재밌다'라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책을 왜 읽어요?"라는 질문에는 생존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답변이 나올 것 같다. 아무리 '생존 독서'라고 하더라도 재미가 없다면 지속하기 힘들지 않을까. 독서가 일처럼 다가오면 동기부여는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책을 재밌어서 읽는다고 했다. 그 대답을 들으면 다수의 사람들은 "책이 재밌다고?"라며 반문한다. 그런데 매일 8시간씩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재밌을까?
칸 영화제에 처음 방문하게 된 이동진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계획을 세웠다. 수십 편의 영화가 펼쳐진 곳에서 1분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극장 사이에서 뛰어다니며 하루 동안 6편의 영화를 감상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타는 순간 구토하고 말았다. 구토한 이유는 영화에 체해서라고 했다.
이동진은 영화평론가이다. 단순히 6편의 영화를 편안하게 앉아서 감상하기 어렵다. 영화를 봤다면 그 영화가 어떠한지 평가를 해야 하는 직업의 특성으로 집중해서 영화를 관람해야 했다. 아무리 영화평론가라고 하더라도 하루에 볼 수 있는 영화의 최대수는 3편 정도인데 6편을 집중해서 봤으니 몸이 버티지 못한다. 이러한 그가 독서는 하루에 8시간씩 30일을 지속해도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재미와 연관 지을 수 있다. 게임, TV와 같은 미디어 매체, 그리고 독서는 재미를 느끼는 진입장벽이 다르다. 책이 재밌으려면 적어도 다른 미디어 매체에 비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재미'의 단계까지 가는 데 오랜 잠복기를 거치는 분야가 바로 '독서'다. 하루 이틀 공들여 어느 단계까지 도달하면 책만큼 재밌는 것도 없다. 어떻게 해야 지루한 잠복기를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을까?
거의 대부분의 다독가는 독서가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독서가 재밌으려면 우선 습관부터 만들어야 한다. 습관은 개인이 세계에 맞서는 방식이다. 전혀 모르는 장소에 들어서게 되면 시간을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습관은 이런 모호함에 맞서는 개인의 갑옷과 같다. 결국 습관은 우리에게 안정성을 부여한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습관은 그 시간을 어떻게 맞설지 준비된 경영 방식이다. 습관을 유지하면 결국 안정감이 생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독서가 습관으로 자리매김하면 책을 읽지 말라고 해도, 책을 읽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장 끈질기고 싫증 나지 않는 취미가 독서가 된다.
습관 형성에는 환경이 매우 중요한 영향이 끼친다. 침대에서 독서하는 습관을 만든 사람은 책상이나 기타 다른 장소에서 책을 읽으려면 잘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어디서 읽는지도 중요하다. 잘 읽을 수 있는 공간을 선택해야 한다. 바쁜 직장인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은 대중교통이 아닐까 싶다. 물론 자차로 출퇴근을 해결하는 직장인이라면 오디오북이 효율적일 것이다. 이처럼 편한 곳에서 책 읽는 습관은 그 공간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의식 속으로 자기를 밀어 넣게 된다.
보통 '책을 읽고 싶냐'라고 물어보면 읽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한다는 대답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시간 가계부를 한 번 써보면 자신이 어떻게 시간을 활용하는지 알게 된다. 물론 직장에서 지속적인 야근으로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락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너무 바빠서 일만 하며 사는 줄 안다. 그러나 책을 읽을 시간이 없지는 않다. 책보다 재밌는 어떤가를 훨씬 많이 알고 있어서 책을 읽을 시간을 확보하지 못할 뿐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 사람은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책이 더 좋으면 TV와 게임을 보거나 하지 않는다. 이러한 취미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은 책을 읽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대지 말자.
1년 평균은 대략 9권 정도다. 평균 9권이라는 뜻은 거의 읽지 않는 사람도 충분히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1년에 100권은 충분히 소화한다. 이러한 사람과 책을 전혀 읽지 않는 9명의 사람과 함께 통계를 내보면 평균 10권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그래서 평균 9권이라는 숫자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 성인은 대략 40%는 1년에 책 1권도 읽지 않는다.
책은 안 봐도 무방하다. 어떤 책을 읽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주로 읽을까? 평균 9권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베스트셀러다. 많이 팔린다는 이유로 많이 팔린다가 베스트셀러의 작동원리다. 어느 정도 판매량이 발생하면 자연스럽게 많이 팔린 책으로 선정되고, 이러한 이유로 상당수의 책들은 많이 팔린 책이라는 이유로 잘 팔린다. 사람들이 자신의 결정을 타인이 얼마나 산 것이냐에 위탁한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게 문학작품만 읽는다. 정반대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문학서적을 읽지 않고 비문학 분야의 책만 고집한다. 적은 독서량보다 편중 독서가 더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고 말하려면 어디에 속해있는지 범주를 알아야 한다. 맥락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는 다른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만 아는 사람은 범주를 모르고, 다른 것을 접하지 않아서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 수많은 삶의 가치들은 소중하다. 그러나 단 하나의 가치, 잣대를 가진 사람은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다.
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이다.
막스 뮐러(독일 철학자)
독서뿐만 아니라 장래 희망에서도 넓게 많이 알아야 한다. 요즘 청소년들의 장래 희망 1위 직업은 연예인이다. 물론 연예인은 좋은 직업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희망이 연예인이면 바람직한 사회는 아니다. 왜 우리 아이들은 장래 희망으로 연예인이 월등히 높을까. 자주 많이 봐서 그렇지 않을까. 세상의 또 다른 길은 알지 못하고 연예인만이 자신의 길인 듯 생각한다.
어떤 한 분야(독서, 직업 등등)에서 깊어지려면 넓이를 먼저 가져야 한다. 군대에서 진지 구축하려고 땅을 판다. 깊이 2m의 땅을 파라는 지시를 받으면 처음에는 1m의 지름 내에서 파기 시작한다. 그러나 깊이 2m의 땅을 파려면 1m의 지름으로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5m의 지름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깊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깊이의 선행 조건이 넓이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직업도 독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넓게 세상을 마주할 수 있다면 소방관, 연예인, 작가, 개발자, 교사와 같이 다양한 분야를 마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중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다름 아닌 독서다.
그렇다면 넓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효율이 높은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기본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왜 스마트폰을 많이 보는지 그 이유를 파악해 보면 가능하다. 물론 여러 이유가 존재한다. 스마트폰을 보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런데 굉장히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가지고 다니니까'이다.
책을 갖고 다니지 않으면 독서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휴대폰으로 전자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책을 들고 다녀야 보게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이다. 심지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으쓱해진다. 차선책은 가방에 넣고 다는 것이다.
넓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다 보면 나와 맞지 않는 책을 고를 때도 있다. 이러한 책은 읽는 내내 고통스럽다. 그러나 독서의 초보는 완독하려고 애쓴다. 어떻게든 조금씩 진도를 나가려고 하지만 도무지 읽히지 않는 책도 존재한다. 이럴 때는 과감히 완독의 부담감을 버려야 한다.
세간의 화제 도서를 구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다른 도서를 당장 보라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보통은 완독을 먼저 하려고 한다. 왜 이러한 심리가 발동할까. 책을 또 사는 건 돈의 낭비라는 생각과 자기 스스로의 실망감이 생겨서 책을 완독하려고 한다. 완독해야 책을 읽는 올바른 태도라는 책임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책은 그 책을 읽는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못 읽겠으면 책장에 넣어두면 그만이다.
박찬욱 감독의 가훈은 '아님 말고'이다. '아님 말고'는 기회가 있는 자의 논리이다. 다른 일이 있어야 '아님 말고'가 가능하다.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도 읽히지 않는다면 '아님 말고'를 시전해야 한다. 세간에 떠도는 베스트셀러라고 99명의 사람이 권해도 한 명인 내가 거부할 수 있다. 이처럼 유명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책에서 흥미를 느껴야 한다는 점이다. 조금씩 넓이를 확장해 나가면 분명 어느 시점에 '독서=재미'라는 공식이 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참고 도서 : 이동진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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