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내기 한 판
클로즈 베타 테스트(CBT)를 앞두고 회사 분위기는 묘하게 들떠 있었습니다. 이건 그냥 '테스트'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만든 걸, 이제 진짜 사람들 앞에 내놓는 그 직전 순간이었으니까요. 말하자면 무대 뒤 커튼이 막 올라가기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CBT 직전, 사업 부서와 개발 부서 사이에 작은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 내기 팀전 게임 한판이었죠. 저희가 만들던 게임은 캐주얼 레이싱 게임이었고, 4대4 팀 경쟁이 가능한 구조였습니다. 단순히 누가 제일 빨리 달리느냐만 중요한 게 아니라, 팀 플레이가 전략의 핵심이 되는 방식이었죠.
예를 들어 이런 식입니다. 아군 중 누군가가 1등을 달리고 있으면, 뒤쪽 플레이어들은 그 1등을 지켜줘야 합니다. 상대팀 캐릭터가 따라잡지 못하도록 몸으로 막고, 아이템을 써서 미끄러뜨리고, 타이밍 맞춰서 속도를 깎습니다. 뒤에서 ‘수비’를 잘하면 앞에서 ‘에이스’가 편하게 결승선을 끊는 구조죠.
이 게임의 재미는 바로 그 팀워크에서 터졌습니다. 각자 개인플레이만 하는 게 아니라 “야 내가 뒤 처리할게, 그냥 앞만 봐!” 같은 말이 실제로 오가게 되는 순간들. 실력도 실력이지만, 팀 조합과 역할 분담이 승부에 영향을 주는 그 손맛.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업팀 vs 개발팀. 작전 회의까지는 아니어도 묘하게 서로 “오늘 지면 좀 자존심 상하겠는데?”라는 분위기가 슬슬 올라오고 있었죠.
당연한 얘기이지만, 개발팀 입장에서는 질 수가 없었습니다. '개발이 졌다'라는 말은, 농담이라도 듣기 싫었습니다. 게다가 사업팀에 지면, 다음 날부터 회의할 때 '아니 어제 졌잖아'라는 말이 튀어나올 수 있거든요. 그것만큼 굴욕적인 건 없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달렸습니다. 아이템으로 막고, 드리프트 각을 재고, 일부러 부딪혀서 상대의 궤적을 흐트러뜨리고. 경기 중에 고함도 나오고 웃음도 터졌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아주 순수한 형태의 만족을 느꼈습니다.
‘아, 우리가 만든 게 재밌구나.’
이건 정말 중요합니다.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게임이 재미없으면 개발자는 굉장히 빨리 무너집니다. '내가 뭐 하는 거지?'라는 현타가 너무 쉽게 오거든요.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달랐습니다.
‘이거 정말 재밌다. 이거 진짜 될 수도 있겠다.’
그 생각이 마음속에 딱 자리 잡았습니다.
그건 희망이었습니다.
이제 진짜 유저들 앞에 나갑니다
내부에서 웃고 떠들던 그 게임은 곧 실제 유저들을 만났습니다. 드디어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열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상대는 동료였습니다. 저와 비슷한 배경, 비슷한 이해도, 비슷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이제부터 마주하게 될 사람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 게임을 사랑해 줄 이유가 없는 사람. 인내심이 낮은 사람. 바로 재미없으면 그냥 끄는 사람. 대신 이 게임할 거 너무 많은 사람들. 말하자면 ‘진짜 시장’이 들어옵니다.
CBT 초기에는 기대감 덕분에 접속이 확 몰립니다. '새 레이싱 게임이라네', '이거 한번 해보자'라는 호기심으로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그 순간은 개발팀 입장에서는 기분이 굉장히 좋습니다.
“우와, 접속자 올라간다.”
“룸 꽉 찼다.”
“매칭 잘 잡힌다.”
“방 꽉 차네.”
“사람 들어온다, 들어온다, 들어온다.”
그런데요. 사람이 많이 들어오면, 반드시 문제가 터집니다.
변수는 항상 사람이 몰릴 때 터진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평소에는 안 나오던 것들'입니다. 혼자 테스트할 땐 한 번도 안 나오던 현상이, 동시 접속자가 확 올라가는 순간 갑자기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서버가 다운됩니다. 특정 맵에서 게임이 시작조차 안 됩니다. 게임 중 무한 로딩 화면에서 멈춘 채로 아무것도 안 일어납니다. 더 심각한 건, 클라이언트가 그대로 Crash 납니다. 즉, 그냥 꺼져버립니다. Crash는 개발자 입장에서 최악의 종류의 문제 중 하나입니다.
그건 단순히 '이거 조금 불편하네'가 아닙니다. Crash는 곧 유저 이탈입니다. 유저 입장에서 보면 상황은 아주 간단합니다.
“아, 튕겼네.”
끝입니다.
분노나 실망조차 남기지 않고 그냥 끝입니다. 그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한 번의 Crash가 그 유저에게는 '이 게임은 아직 준비가 안 됐구나'라는 낙인처럼 찍히고 끝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개발자는 초조해집니다. 왜냐하면 개발자는 그게 숫자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동시 접속자 수.
DAU(일일 사용자 수).
서버 방 생성 건수.
재접속률.
특히 CBT에서는 이 수치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됩니다. 처음에는 확 치솟던 그래프가,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고개가 꺾입니다. 그 꺾이는 곡선은 개발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잔인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만들었는데. 우리가 진짜 재밌다고 믿었는데.”
그런데 숫자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숫자는 무심합니다.
게시판의 말은 때로 칼보다 날카롭다
CBT를 열면 유저들의 반응이 회사 게시판이나 커뮤니티로 들어옵니다. 문제는, 그 반응 중에는 피드백이 아니라 ‘폭탄’도 섞여 있다는 점입니다.
“이딴 것도 게임이라고 만들었냐”
“서버 상태 이게 말이 되냐”
“이거 QA는 했냐?”
“개발자는 도대체 테스트를 하긴 하냐?”
“렉 심하고 튕기고 난리인데 누가 하냐 이걸”
신입 입장에서 이 말들은 그대로 심장에 들어옵니다. 저는 그때까지 '개발자'라는 단어를 점점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밤새 코드 들여다보고, 꿈에서까지 해결법을 떠올리고, 그런 몰입 끝에 '이건 내 UI다'라는 마음을 처음 얻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세상에 나가자마자 들려온 첫 외부 목소리 중 일부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수준 떨어지네.”
그 말을 보면서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회사 바깥은 이렇게 말하는구나.' 거기에는 제 성장 서사 같은 건 들어갈 여지가 없었습니다. 제가 신입인지, 2주 만에 UI 전체를 뜯어고쳤는지, 어떤 일정으로 굴러갔는지, 서버팀이 몇 명인지, 그런 건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저는 유저 경험만 봅니다. 그 외의 것은 다 부차적입니다.
게임이 튕기면 이 게임은 엉망인 겁니다. 매칭이 안 되면 재미가 없는 겁니다. 레이스가 중간에 멈추면 '안 할 게임'이 되는 겁니다. 그건 '이해해 달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근데 게임은 진짜 재밌는데..
아이러니한 건, 저희 게임은 재미가 있었습니다. 최소한 내부에서 느끼는 재미는 분명했습니다. 아이템으로 견제하고, 팀 전술 짜고, 1등을 지켜주는 역할이 있다는 점. 단순히 잘 달리는 사람만 중요하지 않고, 뒤에서 수비 라인을 유지하는 플레이도 가치가 있다는 점. '우리 팀이 이겼다'라는 감각이 개인 점수보다 의미 있게 작동한다는 점.
이건 설계 단계에서 쉽게 나오는 구조가 아닙니다. 꽤 공들여야 나올 수 있는 밸런스였습니다. 저는 그걸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참여하면서 확실히 느꼈습니다. ‘우리는 잘 만들어가고 있어. 이거 그냥 장난이 아니야.’ 하지만 접속자 수는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CBT 초반의 숫자는 올라가고, 그다음은 유지되고, 그다음은 조금씩 떨어집니다. 그리고 하루, 이틀, 사흘.. 그 곡선이 내려가는 걸 보면서 사람의 마음도 같이 내려갑니다. 특히 신입에게 이건 굉장히 해석하기 어려운 경험이었습니다.
“재밌는데 왜 안 해?”
“우리가 해보니까 재밌는데?”
“왜 사람들은 이걸 몰라주지?”
그 감정은 서운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억울함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저는 아주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재밌으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합적이었습니다. 게임이 성공하려면, 실제로는 '재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정성 : 아무리 게임이 재밌어도 3판 중 1판이 튕기면 사람은 떠납니다. 유저에게는 ‘경험의 끊김’ 자체가 피로입니다. 재미는 기쁨이고, 크래시는 짜증입니다. 사람은 기쁨보다 짜증을 더 오래 기억합니다.
진입 장벽 : 조작법이 어렵거나, 매칭 대기 시간이 길거나, UI가 복잡해서 다음에 뭘 눌러야 할지 모르겠으면 유저는 '그냥 나중에 다시 해봐야지'라고 말하고, 그 ‘나중’은 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반 10분은 게임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저는 그때 그 10분의 무서움을 몰랐습니다. 지금은 압니다.
타이밍 : 같은 시기에 더 큰 회사에서 더 눈에 띄는 홍보를 하고, 더 화려한 그래픽을 가지고, 더 큰 네임밸류(“저 회사에서 만들었다더라”)로 밀고 들어오면, 시장의 시선은 한정적이라 거기로 가버립니다. 이건 단지 ‘비교’ 문제가 아니라, 시선의 쏠림 문제입니다. 유저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우리가 들어갈 틈이 없으면, 아무리 재밌어도 안 옵니다.
커뮤니티의 첫인상 : CBT 때 커뮤니티에서 '렉 심함 ㅋㅋ'라는 말이 돌기 시작하면, 그 말이 진짜 체험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말 자체가 바이러스처럼 퍼집니다. 즉, 첫 평판은 그 게임의 2차 유입 속도를 결정합니다. 저는 이걸 직접 체감했습니다.
완성도라는 단어의 잔인함 : 개발자 입장에서 '완성도'는 ‘우리가 넣고 싶었던 요소 중 어디까지 넣었나’입니다. 하지만 유저 입장에서 '완성도'는 ‘이 게임은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가’입니다. 그 두 정의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때의 저는 이걸 몰랐습니다. 정확히는, 이걸 몸으로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단순히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재미있게 만들었고, 실제로 재밌는데 왜 유저는 안 남지?” 지금의 저는 거기에 이렇게 답을 붙입니다. “그건 ‘재미’ 말고도 지켜야 할 조건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장은, 그 모든 걸 동시에 요구합니다.”
처음 마주한 냉정함
CBT 한창일 때, 동시 접속자 수 그래프가 내려가는 걸 함께 보던 날이 있습니다. 모니터 위로 숫자가 찍힙니다. 이전 시간 대비 변화율, 일간 유지율, 신규 유입. 관리자 툴 화면 한쪽에는 유저들의 에러 로그가 올라오고, 다른 쪽에는 커뮤니티 반응이 실시간으로 복사돼 옵니다.
“렉 심함”, “튕김”, “안 맞음”, “말이 안 된다”.
회사 안 공기는 동시에 두 가지 감정으로 채워졌습니다.
하나, 빠르게 고쳐야 한다는 긴박함. 둘, 이미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주는 허탈함. 신입이던 저는 그 사이에서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무력감… 이게 이 직업의 일부인가?’
‘내가 밤새 만든 화면이 욕을 먹는 건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나는 어느 정도까지 책임져야 하지?’
‘얼마나 더 버텨야 “이건 내 게임”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날 저는 한 가지를 아주 선명하게 배웠습니다.
'재밌는 게임'은 '성공하는 게임'과 다르다.
이 말은 냉정합니다. 하지만 현실입니다. 재미는 필요조건입니다.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성공은, 재미 + 안정성 + 타이밍 + 초반 진입 만족도 + 유저 편의성 + 첫 평판 + 비즈니스 판단까지 전부가 같이 맞아야 가능한 기적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건 팀 전체의 싸움입니다. 개발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업만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
제가 이 시기를 떠올리면, 감정은 한 가지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자랑스럽기도 했고, 좌절스럽기도 했고, 억울하기도 했고, 무력하기도 했고, 동시에 이상하게 행복했습니다. 왜 행복이었을까요?
아마 이 감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 이제 진짜 세상에서 싸우고 있구나.’ 이전까지의 저는 늘 준비 과정에 있었습니다. 학원생, 수강생, 연습생, 지원자. 그런데 이때부터 저는 처음으로 실제 시장에 무언가를 내놓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실패하든, 비판 받든, 욕을 먹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건 이제 제 일이 나만의 일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된 일'이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건 쓰라리지만 강력한 성장의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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