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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처음 써본 사직서.

by 곽준원
게임은 막바지로, 삶은 벼랑으로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시간은 정말 말 그대로 '앞으로만' 흘렀습니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멈춰서 호흡할 공간도 없이 계속 앞으로만. 아이는 100일 즈음이 되었고, 그 무렵 우리는 게임의 클로즈 베타 테스트(CBT)를 두 차례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지 약 6개월쯤 되는 시점에는 오픈 베타 테스트(OBT)까지 이어졌습니다. 겉으로 보면 참 멋있는 시기처럼 들립니다.


'아빠가 되고, 내가 참여한 게임이 세상에 나오는 시기.'


한 사람의 인생에서 두 가지 굵직한 사건이 동시에 터지는 시기니까요. 하지만 실제 안쪽은 달랐습니다. 그건 '영광의 순간'이라기보다 '줄에서 절대 미끄러지면 안 되는 순간'에 가까웠습니다. 아이는 생겼고, 가족은 생겼고, 책임은 생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든 게임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CBT 결과도, OBT 이후의 지표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붙잡고 키울 수 있다'라는 분위기까지는 못 갔다는 말입니다. 출시라는 관문은 겨우 넘어갔지만, 그 이후의 생존 싸움에서 이미 힘이 부족하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느끼던 감정은 한 가지였습니다.


'시간이 나의 편을 안 든다.'


그건 게임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제 가족의 생존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회사’와 ‘집’은 완전히 연결된 하나의 문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게임이 흔들리면 회사가 흔들린다. 회사가 흔들리면 내가 흔들린다. 내가 흔들리면 우리 가족이 흔들린다.

문제가 더 이상 내 감정선 안에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건 생활의 구조 그 자체의 위협이었습니다.


협상이라 쓰고 통보라 부르는 것

그 무렵 연봉 협상 시즌이 있었는데, 그건 협상이라는 이름만 붙은 통보에 가까웠습니다. 아이도 태어났고, 이제 한 집의 생계를 떠안게 된 입장에서 저는 조심스럽게 요청했습니다.


“조금만 더 신경 써주실 수 없을까요.”

대표의 답은 이런 뉘앙스였습니다.

“신경 써서 이 정도 인상입니다.”


그 '이 정도'는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작았습니다. ‘나 혼자 사는’ 급여가 아니라 ‘가족을 먹여 살리는’ 급여로 보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 순간 제 감정이 과한 건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 봤습니다.


“혹시 나만 억울한 건 아닐까?”

“내가 과하게 바라는 건가?”


그래서 팀원들과 슬쩍 얘기를 꺼내봤습니다.

“이번에 얼마나 올랐어요?”


결과는 간단했습니다. 다들 비슷했습니다. 그걸 확인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더 안 좋아졌습니다. ‘나만 이렇게 받는 게 아니구나’ 이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는구나'라는 감각이 확 와버렸습니다. 조금 단순하게 말하면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아, 우리는 모두 이 정도 취급이구나.’

그리고 그걸 확인한 순간 제 안에서 한 가지가 명확해졌습니다.

“여기서는 더 못 버틴다.”


절실함은 점점 숫자가 되었다

연봉 협상 이후, 저는 이전보다 훨씬 자주 통장을 봤습니다. 잔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생활비, 아이 용품비, 병원비, 기본적인 고정 비용들만으로도 돈은 빠르게 빠져나갔습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건 책임감이 생기는 일이라고 했지만, 책임감은 동시에 공포심과 직결돼 있었습니다. 가끔은 정말 말 그대로 식은땀이 났습니다.


한밤중에 누워 있는데, 몸은 누워 있으면서 머리는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다음 달까지 버틸 수 있는가. 카드값은 어떻게 되는가. 지금 이 계좌로 버티다가 게임이 망하면, 우리는 어디로 가나.


저는 어느 순간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문장으로 완전히 넘어가 있었습니다. 이건 제가 원래 꿈꾸던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면, 거짓말을 할 여유가 없어집니다. 체면도 덜 중요해지고, 자기 이상도 조금은 내려놓게 됩니다. '이 게임은 성공해야 한다'는 말은 이제 단순한 직업적 목표가 아니라 생존 문장이었습니다.


그 절실함은 때로는 동력이 되지만, 동시에 사람을 갈아버립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 시기를 지나면서 제 자신이 안에서 조금씩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임 개발이 더는 꿈의 장르가 아니라 생활 전쟁터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직을 떠올리다

어느 순간,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 회사 바깥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이건 도망이 아니라 재구성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그냥 행복해지려고 회사를 나가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건 훨씬 더 단순했습니다.


“살아야 한다.”


그래서 저는 조금 더 큰, 안정적인 기업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은 곧, 저에게는 한 단계 더 무거운 도전을 의미했습니다. 이전까지의 저는 게임 개발에서 재미를 기준으로 회사를 골랐습니다.


“내가 이 팀에서 재밌게 만들 수 있을까?”

“이 프로젝트는 내가 손으로 만지고 싶나?”


하지만 이제 기준은 달라졌습니다.

“대우가 나아지는가?”

“경제적으로 버틸 수 있는가?”

“아이 앞으로 1년, 2년 뒤를 책임질 수 있는가?”


이제는 나 혼자만의 진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 선택은 곧 가족의 안정을 좌우하는 결정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제 커리어가 아니라 가족 경제 전략에 가까운 판단이었습니다. 이건 다른 종류의 부담입니다. 그전에 느껴보지 못한 무게입니다.


“내가 좋아서 가는 게 아니라, 가정의 생계를 위해 가는 선택.”

그건 솔직히 말해, 마음을 꽤 짓눌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그걸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이미 태어났고, 그 아이는 저를 아빠라고 부르는 존재였으니까요.


25%라는 숫자

결과적으로 저는 연봉을 약 25% 인상 조건으로 이직 제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제 입장에서는 이건 너무 큰 숫자였습니다. 저에게만 큰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가족에게도, 그 가족의 미래에게도 큰 숫자였습니다.


근데 여기서도 변수는 있었습니다. 제가 면접을 보고, 합격을 받고, 구체적인 입사 날짜를 조율하고 있던 그 시점에서 일이 꼬였거든요. 회사 쪽에서 TO(정원)를 조정해 버린 겁니다.


내부 조직 개편이 있었고, 인원이 바뀌는 흐름에서 제 자리가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뽑고 싶긴 한데, 원래 말씀드린 그 팀은 이제 자리가 애매해졌어요.”

“다른 팀은 어떠세요?”


듣는 순간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또 내가 통제 못하는 변수가 시작됐구나.’ 그 말은 곧 이런 뜻이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원래 상상했던 일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연봉은 맞춰줄 테니, 그래도 올래요?”


이 상황은 제게 되게 묘한 감정을 줬습니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말에 주저했을 겁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지금 합류하는 팀의 코드 스타일은 나와 맞을까? 이 프로젝트의 방향성은 재밌나?' 이런 질문부터 먼저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가야 한다.”


이건 제 자존심을 접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저 자신보다 가정을 우선에 올린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통제 불가능한 세상에 대한 학습

이직 과정에서 깨달은 건 하나였습니다. 세상은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내 계획대로 흘러주지 않는다. 내가 자리를 미리 받아놓고 날짜를 조율하고 있어도, 그 사이에 회사 내부 개편 한 번이면 판이 바뀝니다.


나는 이미 거기로 가기로 결심했고 마음의 준비까지 했는데, 그 회사 입장에서는 '조직 운영상 이렇게 됐어요'라는 한 문장으로 의미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걸 겪으면서 저는 다시 한번 ‘통제 불가능성’을 체험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무기력만 남긴 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통제 불가능성이 곧 무너짐으로 이어졌습니다. 권고사직, 해산, 한 달 방 안, 멍해짐.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아, 세상은 원래 이렇구나. 그러면 나는 여기서 협상을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저는 회사가 바뀐 팀을 제안했을 때, 받아들였습니다. 그건 포기라기보다는 선택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굉장히 현실적이었습니다.


“지금은 재미보다 생존이다.”

이게 저의 판단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저는 아주 조용히 받아들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직업인이 되었습니다. ‘꿈꾸는 개발자’가 아니라 ‘가정을 책임지는 개발자’가 되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 떠나겠다는 말을 꺼낼 때

이직은 어느 정도 정리됐습니다. 이제 남은 건 팀장님께 말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2년 8개월 동안, 우리는 사실상 한 배를 탔습니다. 초기 셋업부터, 콘셉트 바뀔 때마다 다시 붙잡고, 서버 프로그래머 없이 버티던 시절부터, 프로토콜을 하나씩 정의해 가던 순간들까지.


같이 밤을 새웠고, 같이 욕도 먹었고, 같이 웃었습니다. 이 정도의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는 단순한 ‘직장 동료’가 아닙니다. 그건 거의 생존 동반자입니다.


그래서 “저 나가겠습니다”라는 말을 꺼내는 건 굉장히 무겁습니다. 이건 단지 회사를 떠난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 하던 전투에서, 저는 이 지점에서 빠지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그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나는 이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지금도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배신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내가 떠난 다음에 팀이 더 힘들어지면, 그건 결국 내가 남긴 부담 아닌가. 그 부담감이 저를 꽉 잡고 있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연봉 얘기보다 이게 더 무거웠습니다.


팀장의 대답

저는 결국 팀장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정확한 금액까지는 아니지만, 상황은 그대로 드렸습니다.


“여기서 버티다가는 우리 집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아이도 태어났고, 지금 연봉으로는 생활이 너무 빠듯합니다.”

“다른 회사에서 조건을 제시받았고, 그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팀장님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 말은 단순히 허락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이해였습니다.


팀장님은 제 이야기를 제 욕심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저의 상황으로 보았습니다.


“연봉 차이가 그렇게 난다면서요.”

“그럼 가야죠.”

그 말이 저를 울컥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가 제 선택을 비난하지 않고 인정해 준다는 건, 특히 그 선택이 가족을 위한 선택일 때, 정말 크게 다가옵니다. "이직하는 곳에서 잘 적응하면 좋겠다”는 응원까지 들었을 때, 저는 마음속에서 묵직하게 걸려 있던 죄책감이 조금 내려앉는 걸 느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떠나는 사람'이 되어봤고, 동시에 '남은 사람의 마음'을 들었습니다. 그건 제게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팀은 그냥 코드 공유하는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팀은 서로의 사정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누군가가 팀에서 떠날 때 쉽게 뭐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건 배신이 아니라, 각자의 생존 방식이니까요.


첫 사직서

그렇게 저는 제 인생 첫 사직서를 썼습니다. 사직서는 외형만 보면 별 게 없습니다. '언제 부로 퇴사하겠습니다' 짧은 문장 몇 줄이면 끝납니다.


하지만 그 몇 줄 안에는 너무 많은 게 들어 있습니다. 제 첫 긴 개발 기간 전체가 들어 있었고, 제가 공유했던 밤샘과 웃음이 들어 있었고, 팀과 쌓은 신뢰가 들어 있었고, 아이의 미래가 들어 있었고, 제 통장 잔액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걸 제출하는 순간, 저는 참 복잡한 기분이었습니다. 제 한 시절이 끝났다는 실감이 났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제가 한 단계 더 나이 먹었다는 것도 실감이 났습니다. 사직서를 내는 일은 그냥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제 인생의 우선순위를 새로 적는 작업이었습니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이제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이제 나는 무엇을 더 이상 감수하지 않겠는가?


사직서는 제 명함을 바꾸는 종이가 아니라, 제 정체성을 바꾸는 종이였습니다.





#사직서 #이직 #생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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