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말을 멈추고 마음을 듣는 연습.

낮은 무릎 경청

by 곽준원

페이스북은 종종 잊을 만하면 제 삶에 작은 파문 하나를 던져 주는 것 같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습관처럼 로그인했다가, 오랜만에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아이 유치원 시절, 부모 교육을 해주셨던 선생님. 그분이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타임라인 어딘가에 조용히 올라와 있었습니다.


‘낮은 무릎 경청’


짧은 문장이었지만, 금세 눈길이 갔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경청'이라는 설명이 덧붙어 있었고, 저는 그 표현에 이상하게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듣는 것 하나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니, 무슨 뜻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메신저 창을 열었습니다.


“선생님, 잘 지내시나요? 예전에 유치원에서 강의 들었던 ○○ 아빠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안부 인사는, 뜻밖에도 저와 우리 가족을 낮은 무릎경청 발대식으로 이끌었습니다. 피터팬과 후크 선장을 주제로 유치원에서 이벤트를 했던 날로부터 이미 4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때 유치원생이던 아이는 어느새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고, 저와 아내도 조금은 다른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발대식에서 저는 처음으로 Free Listening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프리허그가 '아무 조건 없이 안아주는' 캠페인이라면, 프리리스닝은 '아무 조건 없이 들어주는' 캠페인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길거리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릴게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낯선 사람의 말을 그저 조용히 들어주는 사람들.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조언하지 않는 경청의 자리.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거의 반사적으로 제 일상을 떠올렸습니다.


회사에서 동료들이 푸념을 할 때, 저는 얼마나 자주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들어주기보다 "그러니까 원래는...”이라며 해결책부터 꺼내 들었는지. 아이와 아내가 힘들다고 털어놓을 때, 나는 얼마나 빨리 분석하고 결론을 내려 버렸는지. 프리리스닝은 그런 저를 거울처럼 비추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선생님은, 프리리스닝을 한 단계 더 확장한 개념으로 ‘낮은 무릎 경청’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제가 무릎을 굽혀야 합니다. 어른의 눈높이에 아이가 올라올 수는 없습니다. 항상 먼저 무릎을 낮추는 쪽은 어른이어야 합니다. 낮은 무릎 경청이라는 이름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단지 말을 들어주는 것을 넘어, 상대의 높이까지 내 자세를 낮추어 가는 경청. 눈동자까지 맞춰 보려고 노력하는 태도. 그 설명을 듣는 순간, 제 머릿속에는 선명한 장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아이와 이야기할 때, 저는 과연 얼마나 자주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추고 있었을까. 우리 사회에는 감정을 속에 눌러 담는 문화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참아라’.

‘괜찮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말을 들으며 자라면,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일이 점점 어렵게 느껴집니다. 한국에는 ‘한(恨)’이라는 정서가 있다고 합니다. 설명하자면 길지만, 요약하자면 제대로 풀리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에 가깝습니다. 억울함, 슬픔, 분노, 서러움이 뒤엉킨 채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안쪽으로만 깊어지는 상태.


그렇게 쌓인 감정이 어느 순간 폭발하듯 터져 나오기도 하고, 혹은 끝내 바깥으로 표현되지 못한 채 조용히 사람을 소진시키기도 합니다. 마포대교에 '생명의 다리' 프로젝트가 생겼을 때, 많은 이들이 난간에 적힌 문장을 보았습니다.


“힘들었지?”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그 문장들이 위로가 되기를, 적어도 한 사람이라도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통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심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위로의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사람의 말이, 먼저 들어주어져야 한다.”


살아갈 의욕을 잃은 사람에게 수십 개의 희망 문장을 건네기보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번 말해 보시겠어요?” 이렇게 물어주는 사람이 사실은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낮은 무릎 경청 캠페인은 그래서, ‘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니라 ‘귀를 내어주는 사람’을 늘리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1시간이든, 2시간이든, 누군가 자신 안에 쌓아둔 이야기를 쏟아낼 때, 그 옆에서 충고도, 평가도, 조언도 하지 않고 그저 들어주는 사람.


“그럴 만했겠네요.”

“정말 많이 힘드셨겠어요.”


이 정도의 짧은 말만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마음이 조금씩 풀려 내려가는 모습을 저는 여러 번 보아 왔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털어놓을 기회를 살면서 거의 가져보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부담스럽겠지?”

“이 말을 꺼냈다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면 어떡하지?”


그래서 감정을 눌러 삼키고, 그 대신 농담이나 무관심으로 덮어 버립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결코 ‘사라지는 방식’으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감정은 표현될 때, 그리고 그 표현이 '존중받을 때' 비로소 조금씩 힘을 잃습니다.


그 과정의 핵심이 바로 경청이라고 저는 믿게 되었습니다. 발대식에 참석한 뒤로, 저는 의식적으로 '듣는 연습'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누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떠오르는 해석과 판단을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 내가 할 말을 준비하는 대신 상대의 표정과 말의 흐름에 집중하려고 애썼습니다.


아이와의 대화에서도 작은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아이의 말은 종종 제 귀에 배경음처럼 흘러갈 때가 있었습니다.


“아빠, 오늘 학교에서 있잖아..”


이야기가 시작되면 저는 고개만 끄덕이며 머릿속으로는 다른 일을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메일 답장을 떠올리거나, 내일 해야 할 업무를 정리하는 식으로요. 낮은 무릎 경청을 알고 난 뒤에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아이 앞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려 했습니다.


아이의 키에 맞춰 앉거나 쭈그려 앉아서 “그래,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묻는 것. 대단한 변화는 아니었지만, 그 짧은 1분, 3분의 시간이 아이에게는 꽤 중요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아이의 눈빛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아빠가 지금은 진짜 내 얘기를 듣고 있구나”라는 안도감 같은 것. 그 표정을 보고 나면 저도 자연스럽게 더 집중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대인 관계에서도 경청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실제로 실천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듣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미 답을 준비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 힘들다고 말하면 “그래서, 내 결론은 이거야”를 꺼내고 싶은 유혹이 강합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청은 방향이 조금 반대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내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이 아니라, 당신이 쏟아낼 수 있는 만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이런 태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낮은 무릎 경청은 ‘낮추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자기 자존심을 낮추라는 뜻이 아니라, 시선의 높이를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내 기준, 내 속도, 내 가치관을 중심에 두기보다 상대가 서 있는 자리에서 그 사람이 바라보는 풍경을 한 번 같이 봐주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상대방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한’이 조금은 다른 온도를 띠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사람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그 말을 낮은 무릎 경청 캠페인을 통해 조금은 몸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도 여전히 완벽한 경청자는 아닙니다. 지치고 예민한 날에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아이의 긴 하소연에 중간에 짜증 섞인 말을 튀어나오게 할 때도 있고, 동료의 고민을 듣다가 “그냥 이렇게 하면 되잖아”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 또 높은 의자에 앉은 거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무릎을 굽힌다는 것은 자주, 그리고 의식적으로 연습하지 않으면 쉽게 잊히는 동작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집중해서 들어주는 1분, 3분이 어떤 날엔 하루 전체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용히 30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마음속 어딘가에 켜지는 작은 불빛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지금도 저는 완벽하게 실천하지는 못하면서도, 꾸준히 경청을 향해 방향을 돌리려 애쓰고 있습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의 다리’가 되어 줄 수 있다면,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제 삶은 충분히 의미 있다고 조심스럽게 믿어보고 싶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52화] 개발자가 독서할 시간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