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습니다. '오늘 나는 도대체 어떤 감정을 느끼면서 하루를 보냈을까?'였습니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말은 늘 비슷했습니다.
'바빴다.', '힘들었다.', '짜증 났다.'
그런데 곰곰이 들여다보면 이 단어만으로는 마음의 하루를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아침에 알람이 울리면 끄고 다시 이불에 눕고 싶었던 순간의 무력감, 출근길 버스 안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두근거림, 점심시간에 동료와 웃으며 나눴던 안도감,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핀잔을 받았을 때의 서운함과 분노. 이걸 모두 '힘들었다', '짜증 났다'라는 한 단어로 덮어버린 셈이었습니다.
화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외로웠던 감정.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친한 친구에게 꽤 긴 메시지(카톡)를 보냈는데, '1'이 사라진 뒤에도 몇 시간 동안 답장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바쁜가 보다 했는데,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이상하게 뒤틀리기 시작했죠.
'아니.. 카톡을 읽고도 답을 왜 안 하지? 날 무시하는 건가.'
머릿속에서는 분노가 점점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 붙였습니다. '에휴. 내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게 문제야. 역시 사람은 믿을 게 못 돼.', '나만 애쓰고 있었던 거였네.'
그날 밤, 이불에 누워서야 비로소 속마음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진짜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나 혼자라는 느낌이 들어서 외로운 걸까?' 조용히 감정을 하나씩 분해해 보니 그 안에는 분노보다 먼저 자리 잡고 있던 감정이 나타났습니다.
'혹시 내가 부담이 되었나? 내가 귀찮은 사람인가?' 하는 불안과 '나는 이렇게까지 너를 신경 쓰는데, 너는 아닌가 보네.'라는 서운함, 그리고 '내가 중요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외로움이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표면에 올라온 건 '화났다'였지만, 그 밑바닥에는 '외롭다, 불안하다, 서운하다'가 층층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내가 지금 진짜로 느끼는 감정은 뭘까?'라는 질문을 조금 더 자주, 조금 더 진지하게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신호 체계'
예전의 저는 감정을 그저 기분 정도로만 여겼습니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고, 짜증 나면 짜증 나는 거지, 거기에 무슨 말을 더 붙여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수의 심리학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감정은 기분을 넘어, 뇌와 몸과 행동을 잇는 일종의 '신호'라는 것을 말입니다.
두려움은 '위험하다, 조심해라'라고 경고하는 신호이고, 분노는 '나의 경계가 침범당했다'는 알림이며, 슬픔은 '무언가를 잃었다.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마음의 반응입니다.
우리는 종종 감정을 방해물로 취급합니다. '쓸데없이 예민하지 말자.', '감정에 휘둘리지 말아야지.' 같은 말을 습관처럼 하죠. 하지만 감정을 신호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관점이 조금 달라집니다.
어느 날 출근길, 프로젝트 결과 발표를 앞두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났습니다. 예전 같으면 '아 왜 이렇게 겁이 많지. 진짜 도망치고 싶다.'라고 스스로를 탓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날은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아.. 내 몸이 발표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알려주는 거구나. 망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이렇게 두근거림으로 나오고 있구나.'
감정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보내는 신호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이 신호를 제대로 '읽을 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기본 감정과 복합 감정 - 마음속 레고 블록
감정을 공부하다 보면 재미있는 개념을 하나 만나게 됩니다. 바로 '기본 감정'과 '복합 감정'입니다. 기본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입니다.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혐오, 놀람.
이렇게 여섯 가지는 마치 색연필 세트의 기본 색처럼, 가장 바닥에 깔려 있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은 훨씬 더 복잡합니다.
서운함, 억울함, 질투심, 허탈함, 기대심, 긴장감, 공허함 등등..
이런 감정들은 대부분 '복합 감정'입니다. 기본 감정들이 섞이고, 상황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혼합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운함은 슬픔과 분노가 함께 들어 있는 감정일 수 있습니다. 질투에는 두려움(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분노, 열등감이 함께 공존합니다. 억울함에는 분노와 함께 '내가 존중받지 못했다'라는 무력감이 섞여 있습니다.
어떤 날 회사에서 이런 일을 겪었습니다. 회의에서 제가 열심히 작업하여 제안했던 내용의 반응이 시원찮을 때, 머릿속에서는 바로 '화난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곧 뒤이어 이런 생각들이 뒤따라왔습니다.
'나는 왜 맨날 설명을 더 해야 하지?'
'사람들이 나를 전문가로 인식하지 않는 건가?'
'내가 여기서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는 사람인가?'
그때 제가 느낀 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존중받지 못했다는 모욕감, 충분히 설명해도 소용없다는 허탈함, '앞으로도 계속 이럴지도 모른다'라는 무력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던 겁니다.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이 보내는 신호는 늘 한 가지 색이 아니라 레고 블록처럼 여러 조각이 끼워져 있는 형태라는 것을요.
감정은 흑백이 아니라 '농도와 스펙트럼'이다.
감정을 몇 개의 단어로만 표현하다 보면 마음속 풍경이 흑백 사진처럼 단순해집니다. 그런데 실제 감정은 훨씬 더 섬세한 그라데이션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안'이라고 말하지만, 그 안에는 긴장, 초조, 걱정, 공포가 서로 다른 농도로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불안, 긴장, 초조함, 공포. 이 네 가지는 같은 줄기의 감정이지만, 강도와 결이 조금씩 다릅니다. 결과 발표를 하루 앞둔 저녁에는 긴장 정도였던 것이, 발표 30분 전에는 초조함, 마이크를 잡는 순간에는 손이 떨릴 만큼의 공포에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 흐뭇함, 희열, 들뜸. 아이가 처음 자전거를 혼자 타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는 조용한 흐뭇을 느끼며, 오랫동안 준비한 프로젝트가 드디어 성공했을 때는 몸이 저절로 튀어 오를 만큼의 희열과 들뜸이 찾아옵니다.
이 차이를 언어로 구분할 수 있게 되면 내 마음의 풍경은 조금 더 선명한 색을 띠게 됩니다. 물론 그 스펙트럼을 자세하게 쪼개는 작업은 오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그냥 좋았어'가 아니라, '조용히 안심되는 기쁨이었다.', '조금 들떠서 가슴이 뛰는 기쁨이었다.'라고 표현할 수 있게 된다면 점차 마음의 색상은 선명해집니다.
왜 우리는 감정을 '그냥 짜증'으로 묶어버릴까.
우리는 일상에서 감정을 대충 묶어서 표현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냥 짜증 나요", "그냥 싫어요", "그냥 불편해요". 이러한 말만으로는 그 사람의 마음의 구체적으로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짜증 속에는 피로, 실망, 서운함, 지루함, 걱정, 무력감, 우울감 등 온갖 감정이 섞여 있을 수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려 버립니다.
거기에 사회적 기대도 한몫합니다. "남자가 왜 그렇게 예민하냐", "어른이 되어서 왜 그렇게 감정 조절을 못하냐", '전문가는 감정을 드러내는 거 아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자란 사람들은 어느새 감정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유치한 것', '프로답지 못한 것'이라고 느끼게 된 것이죠. 결국 남는 말은 "그냥 짜증 난다' 정도뿐입니다.
하지만 감정을 무시한다고 해서 감정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름을 붙여 인식하지 않거나,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감정은 대부분 몸 어딘가에 남아, 두통이 되거나, 짜증 섞인 말투가 되거나, 관계를 갉아먹는 냉소가 되어 나타납니다.
감정의 언어를 배우는 일
그래서 저는 어느 날부터 아주 작은 실험을 시작해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름 하여 '오늘의 감정 일기'. 방법은 단순합니다. 하루가 끝날 무렵, 다음 네 가지 큰 감정 분류를 떠올립니다.
1. 기쁨, 만족, 안정, 설렘, 기대
2. 분노, 짜증, 억울, 원망, 모욕감
3. 슬픔, 외로움, 공허, 상실, 실망
4. 두려움, 불안, 초조, 긴장, 위축
그 가운데 오늘 하루 동안 가장 자주 느꼈던 감정을 2~3개 정도 골라봅니다. 그리고 아주 짧은 문장을 한 줄 씁니다.
"나는 오늘 ___한 상황에서 ___한 감정을 느꼈다."
예를 들면, 나는 오늘 회의에서 내 의견이 끊겼을 때 무시당한 것 같은 모욕감과 서운함을 느꼈다. 나는 오늘 아이가 다녀와서 "아빠 오늘 학교에서 친구들과 재밌게 놀았어"라고 말할 때 안심과 호기심을 느꼈다. 나는 오늘 처리 못한 업무가 머리에 계속 남아서 불안과 초조함을 느꼈다.
이렇게 쓰고 나면 신기하게도 그날의 감정들이 조금 정리됩니다. 물론 그 순간에 떠올리면 당시의 감정을 정확하게 인식하기는 어려워도 충분히 뭉뚱그려 '오늘 스트레스받았다'라고 말할 때와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감정은 더 이상 막연한 덩어리가 아니라, 내가 이해하고 다루어 볼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오늘, 나의 감정을 한 번만 더 물어보는 연습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오늘 하루 동안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잠시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 문장에 아주 솔직하게 적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나는 지금 ___의 상황에서 ___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감정의 언어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적이 거의 없어서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는 새로운 언어입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감정이라도 '그냥 짜증'이 아니라 서운함, 무력감, 걱정, 안도감처럼 조금 더 구체적인 이름으로 불러줄 수 있다면 그 순간 이미 내 마음과의 거리는 한 걸음 가까워진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내 감정을 예전보다 조금 더 정확하게 알아차리려 노력했다'라는 그 문장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분명히 조용한 기쁨을 느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기쁨이 감정을 이해하는 긴 여행의 첫걸음이 되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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