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분 어때요?"
누군가 이렇게 물으면 저는 여전히 한 박자 머뭇거린 뒤 대답하곤 합니다.
"어.. 글쎄요. 그냥 그래요."
딱히 우울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신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설명하려고 하면 말이 길어질 것 같고, 그냥 이 말 한마디면 대화가 깔끔하게 끝날 것 같아서요. 그런데 대화가 끝나고 나면 뒤늦게 마음 한구석이 조금 찜찜해집니다.
'근데.. 진째 요즘 난 어떤 기분이지?'
'그냥 그렇다'는 말 뒤에 숨은 진짜 감정들
어떤 날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책상 의자에 털썩 앉자마자 아내가 묻습니다.
"오늘 기분은 어땠어요?"
"그냥.. 평범했지 뭐."
그렇게 말해놓고 가만히 하루를 다시 되감아 보면 사실 '평범'이라는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이 줄줄이 떠오릅니다. 아침 출근길에 버스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았을 때의 편안함, 메일함에 꽉 찬 업무 공지를 보고 느꼈던 답답함, 점심시간에 동료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잠깐 느꼈던 즐거움, 회의에서 던진 의견이 가볍게 흘러가 버렸을 때의 서운함, 집에 오는 길에 문득 밀려왔던 알 수 없는 공허함까지.
하루를 통째로 "그냥.. 평범했지 뭐."라고 말하는 건 마음속에서 서로 다른 색깔로 빛났던 감정들을 몽당 섞어서 회색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정에도 '단어 수'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감정의 발견>이라는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단 감정에 이름을 붙이면 그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문장을 읽는데 갑자기 국어사전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싶을수록 더 많은 단어가 필요하듯,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오랫동안 너무 적은 수의 감정 단어만 써왔습니다.
좋다, 별로다, 짜증 난다, 괜찮다, 그냥 그렇다, 힘들다.
이렇게 몇 개 안 되는 표현 안에 제 하루의 거의 모든 감정을 다 욱여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스스로도 '왜 힘든지', '뭐가 그렇게 짜증 나는지'를 잘 모른 채, 그저 뿌연 안갯속에 서 있는 기분만 반복해서 느끼게 됩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내 감정 어휘를 조금 늘려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에도 '계열'과 '뉘앙스'가 있다
기쁨 계열: 만족, 뿌듯함, 안도, 설렘, 기대, 감동
슬픔 계열: 서운함, 상실감, 후회, 외로움, 무기력, 실망
분노 계열: 짜증, 억울함, 답답함, 무시, 모욕감
불안 계열: 초조함, 긴장, 걱정, 당황, 두려움
혐오 계열: 불쾌함, 거부감, 수치심, 경멸
어느 날 노트를 펼쳐 두고, 떠오르는 감정 단어들을 줄줄이 적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다 보니 자연스럽게 비슷한 것끼리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심리학 책에서 언급한 내용과 검색에서 얻은 여러 단어들을 범주별로 묶어 놓고 보니 마음속이 조금은 정리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으면 저는 보통 '짜증 나네'라고 속으로 생각하지만, 조금 더 정확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걱정'과 '초조함'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혹시 아픈 건 아닐까?' 하는 걱정, '현관문 나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이러다 또 지각하는 거 아닌가?' 하는 초조함이죠.
회의에서 의견이 무시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화난다'라고 말하지만, 속을 파보면 '모욕감'과 '서운함'에 더 가깝습니다. 내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것 같은 서운함과 내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 인가 하는 모욕감 말입니다.
감정을 이렇게 나눠서 보면 '화난다'라는 표현 하나로는 도저히 담기지 않는 미묘한 감정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단어가 늘어날수록 마음의 해상도가 같이 올라가는 느낌입니다.
"기분 나빠요" 대신 더 정확한 문장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무심코 한 말에 마음이 콕 찔린 순간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날 하루 종일 속으로만 중얼거렸을 겁니다.
'진짜 기분 더럽네.'
그런데 그날은 일부터 노트를 펼쳐 이런저런 문장을 적어봤습니다.
'나는 지금 억울함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왜냐하면 내 노력이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문장을 다 쓰고 다시 읽어보면서 방금 전의 불편함이 '그냥 기분 나쁨'이 아니라 꽤 구체적인 구조를 가진 감정이라는 게 보였습니다. 그 사람의 말투가 거칠어서가 아니라 내가 꽤 애써서 해낸 일을 별것 아니라는 듯 툭 치고 지나간 태도 때문에 마음 한가운데 '인정받고 싶었던 기대'가 덜컥 부서진 거였죠. 그걸 깨달은 후에 상대에게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까 그 말 들었을 때 조금 억울했어요. 제가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쓴 일이라서 그냥 흘려 들린 것 같아 서운했거든요."
만약 제가 "그냥 기분 나빴어요"라고만 말했더라면 대화는 아마 한참 빙빙 돌다가 감정의 해소가 되지 않은 채 끝났을 겁니다. 조금 더 정확한 감정 단어 하나가 관계를 부드럽게 되돌리는 열쇠가 되어 준 셈입니다.
감정 단어장을 만들면 생기는 변화
어느 날부터 조금씩 스마트폰 메모장에 '감정 단어'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단어를 발견할 때마다 혹은 책이나 강의에서 마음에 와닿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하나씩 추가해 두었습니다.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가벼움, 안심, 여유
왠지 모를 두근거림이 있다: 기대, 긴장, 설렘
사람 많은 모임에 갔다 오면 늘 지친다: 피로, 부담감, 위축
처음에는 메모장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습니다. '감정 단어장이라니, 내가 너무 유별난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메모장이 생각보다 꽤 든든한 '마음 지도' 역할을 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 메모장을 열어 보며 그날의 감정을 골라 보는 루틴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나는 팀 회의에서 의견이 끊겼을 때 무시당한 느낌과 억울함을 느꼈다', '오늘 나는 출근길에 하늘을 보다가 오랜만에 잔잔한 기쁨과 편안함을 느꼈다', '오늘 나는 처리하지 못한 일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초조함과 걱정을 느꼈다'라는 한 줄만 써도, 마음이 조금 정리되었습니다. '그냥 우울하다', '그냥 힘들다'라고 퉁치고 넘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감정 어휘력이 올라가면 달라지는 것
감정 단어장을 늘려본 뒤로 제 안에서 달라진 점들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로 감정 조절이 예전보다 수월해집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감정은 이미 한 번 정리된 상태가 됩니다. '막연한 불안'과 '내일 발표를 망칠까 봐 드는 두려움'은 다르게 다뤄야 한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전자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한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지만, 후자는 발표 연습을 조금 더 해보는 식으로 구체적인 해결책을 떠올릴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두 번째로 관계에서의 오해가 줄어듭니다. "기분이 나빠요"라는 말 대신 "무시당한 느낌이 들어서 속상해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상대도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 이해하기 훨씬 쉬워집니다. 감정의 이름을 세밀하게 붙이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세 번째로 내 감정의 '패턴'이 보입니다. 메모장을 오래 쌓다 보면 자주 반복되는 단어들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 '초조'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어떤 사람은 '서운함', '억울함'이 계속 기록됩니다. 저 역시 메모를 통해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유난히 예민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반복 패턴의 감정 유형을 알고 나니 비슷한 상황에서 관계를 끊어내는 이유로 삼기보다는 '아.. 또 내 민감한 지점이 눌렸구나'라고 한 발 물러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정은 작게 쪼갤수록 다루기 쉬워진다
감정 어휘를 넓혀가는 일은 거창한 훈련이 아닙니다. 그냥 하루에 한 번 스스로에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 생각해 보는 시간만 가져도 충분합니다.
만약 '짜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면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는 겁니다. 이건 사실 피곤함 때문일까, 무시당한 느낌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해서일까. 그렇게 감정을 조금 더 잘게 쪼개는 과정만으로도 마음에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살펴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의 끝에 스스로에게 "나는 오늘 ___한 상황에서 ___라는 감정을 느꼈다"라고 스스로에게 이런 문장을 선물해 보세요. 처음에는 빈칸을 채우는 일이 어색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며칠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 예전의 나는 내 감정을 너무 막연하게 대하고 있었구나.'
감정 단어 사전을 조금씩 채워 가는 일은 결국 내 마음이 어떤지 이해하는 지도를 조금씩 넓혀 가는 일과도 같습니다. 혹시 지금 떠오르는 감정 단어가 하나 있다면 그 단어를 오늘의 첫 번째 항목으로 조용히 적어 봐도 괜찮습니다. 그 한 줄이 내일의 나를 조금 더 잘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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