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5분,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

by 곽준원

처음 '감정 노트'를 써보면 삶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굳이 이런 걸 적어야 하나.. 그냥 머릿속으로만 정리해도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루에 감정을 인식할 새도 없이 바쁘기도 하지만 그걸 굳이 글로 남기는 일은 어딘가 과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일기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데 감정까지 생각해 보고 쓰려니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하게 본 유튜브 강의 영상에서 큰 울림을 얻었습니다.


"감정은 그냥 지나가면 금세 흐려지지만, 한번 적어 두면 정지화면처럼 붙잡을 수 있습니다. 기록되는 순간, 감정은 막연한 기분에서 정보로 바뀔 겁니다."


이러한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거든요. 그동안 저는 그 '정보'를 한 번도 제대로 확인해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정이 올라오면 대충 덮고, 넘어가고, 금세 잊어버렸거든요.


오늘 기분이 어땠는지 한 줄만 써 보세요.

감정 노트를 처음 써본 날은 아주 지친 평일 밤이었습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가방을 내팽개치고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책상에 던져둔 작은 공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감정을 써보려고 마음먹고 산 노트였고, 오늘 나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제대로 적어보자고 다짐의 증거였습니다.


대충 펴서 날짜를 적고,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독서 모임'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동네에서 모이는 작은 모임이었는데, 그날은 제가 준비를 꽤 해갔습니다. 책을 읽고 밑줄을 치고, 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두었거든요.


모임 중간에 제가 이야기할 차례가 왔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사실 저는 막연하게 이야기하기보다는 전후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야 다른 사람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느낀 내용을 서툴게 말하기도 합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주변의 공기가 멈추는 듯했고, 진행자는 "네. 다음 분 말씀 들어볼까요?"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저의 이야기에 여러 피드백을 받고 싶기도 했던 마음이 있었지만, 그 뒤로 대화의 방향은 다른 쪽으로 흘러갔고, 제가 꺼낸 이야기는 금세 잊혀 버렸습니다.


그때는 그냥 '약간 민망하다..' 정도로 넘겼는데, 노트 앞에 앉으니 그 장면이 어땠는지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강의에서 배운 방식대로 한 줄을 써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첫 줄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의 상황.

'독서 모임에서 내 의견을 말했지만, 진행자가 바로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다. 설명의 시간이 조금 길어서 빠르게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서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이렇게 적고 나니까 그냥 '찝찝했던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구체적인 장면이 되었습니다. 막연함이 조금 걷히면 감정도 덜 무섭게 느껴집니다. 그다음에는 감정 이름을 적는 칸을 만들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기분 나쁨' 정도로 끝났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정확하게 써보기로 했습니다.


감정 이름.

처음에는 무안함, 그다음에는 서운함, 그 뒤로 소외감, 아주 작게는 부끄러움까지.. 단어를 고르는 사이, 제 마음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기분이 나쁜 것'만이 아니라, '내 말도 잠깐은 머물러주길 바랐던 마음', '관계 안에서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이 섞여 있었던 겁니다. 그다음에는 감정의 강도를 1부터 10까지 적어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잠깐 고민하다가 이렇게 적었습니다.


감정 강도 6/10: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계속 떠올랐다. '내가 왜 그렇게 길게 말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숫자로 적는 건 별것 아닌데, 묘하게 감정과 생각 사이에 거리가 생깁니다. 완전히 무너진 것도 아니고,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 중간 어딘가. 그 '중간'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이 조금 더 안정적으로 보입니다.


감정 뒤에 숨어 있던 '자동 생각'을 만났을 때

감정 노트에서 가장 낯설었던 부분은 '그때 떠오른 생각'을 적는 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짜증 난다'라는 문장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감정이지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정직하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을 꺼내보려고 애썼습니다.


떠오른 생각.

'내 말은 흥미롭지 않은가 보다.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했네.'


이 문장을 적으면서 창피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종이에 적힌 글자들이 너무 솔직해서 마치 예전 일기장을 들킨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부끄러움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내 감정을 크게 만드는 건 상황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상황 위에 얹힌 저의 해석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진행자가 바로 넘어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았다'라는 건 그 사실 위에 제가 급하게 붙여버린 '결론'이었거든요.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 둘을 계속 한 덩어리로 믿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몸이 먼저 말해주는 감정의 언어들

감정 노트에는 신체 반응과 행동을 적는 칸도 있습니다. 이런 것까지 적어야 하나 싶었지만, 제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고 한 번 적어봤습니다.


신체 반응 / 행동

말할 때 입술이 바짝 마르고,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모임 후반에는 말수가 줄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아무 말 없이 사람들의 대화에 끼지 않았다.


이러한 내용을 쓰고 보니까 제 몸이 이미 충분히 '불편하다'라고 말해주고 있었던 겁니다. 말로는 '괜찮은 척' 했지만, 몸은 이미 긴장과 위축을 다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칸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며 느끼는 점

"서운했던 건 사실이다. 다만 그 순간 '내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은가 보다'까지 갈 필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모음 뒤에 진행자에게 '저의 이야기를 어떻데 들으셨는지' 조용히 물어보는 것도 방법이다."


이렇게 사실과 감정을 분리하고,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보겠다는 마음가짐을 써보면서 마음에 작은 숨구멍이 생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장면은 이미 지나갔지만, 내일의 나는 조금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사소한 것까지 적어야 하나요?

감정 노트를 쓰다 보면 '이 정도는 적을 거리도 아니지 않나?'라며 내면에서 검열을 하는 일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죠.


엘리베이터 Open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먼저 가세요"라고 했는데 아무 반응 없이 그냥 나갈 때. 가족 식탁에서 내가 내뱉은 속상함을 하소연해도 중간에 끊어지고, 다른 화제로 바로 넘어갈 때.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는 한참 뒤에야 답이 오는데, 다른 사람 이야기에는 바로 반응이 달릴 때.


겉으로 보면 정말 사소한 장면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순간들은 하루가 끝날 때까지 마음에 남아 있을 때도 종종 생깁니다. 예전의 저는 '아.. 내가 쪼잔하고 예민해서 이런 생각들이 계속 나는구나'라며 마음속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감정 노트에 몇 번 적는 연습을 해보니까 다른 그림이 보였습니다. 제가 반복해서 쓰는 단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서운함, 소외감, 존재감이 흐려지는 느낌. 이 감정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건, 제가 그만큼 관계 속에서 존중과 연결감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나는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잘 웃지만, 자주 상처를 받기도 한다.'라고 인정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해줄 수 있게 된 건, 사소해 보이는 어떤 상황 가운데 느끼는 감정까지도 한 줄씩 적어본 덕분입니다.


길게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신 자주 써봐야 합니다.

처음 감정 노트를 시작할 때는 그날의 감정을 길세 써야 할 것 같은 부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까 중요한 건 길이보다 빈도에 있었습니다. 이상심리학에서는 감정 노트를 역기능적 일일기록표라고도 부릅니다. 역기능적 일일기록표에서도 다섯 가지를 작성하라고 알려줍니다.


오늘의 상황, 감정 이름, 강도(1~10), 떠오른 생각(자동적 사고), 회고(지금 돌아보며 느끼는 점)


이렇게 기록을 하면 '그냥 별로였다'로 덮어버리는 것과는 결과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또 하나 도움이 됐던 건, 자주 등장하는 감정에 표시를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서운함은 파란색, 불안은 노란색, 분노는 빨간색, 기쁨은 초록색. 마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나오는 감정 캐릭터의 색상처럼요. 몇 주가 지나 노트를 펼쳐보면 알게 된 사실은 유난히 파란색이 많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제야 '왜 나는 이렇게 자주 서운할까?'가 아니라 '서운함이 올라오는 순간에 어떤 욕구가 흔들릴까?'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 질문이 생기고 나서부터 서운함이 올라올 만한 순간 앞에서 조금 더 일찍 나를 돌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하나씩 실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감정 노트는 '성과'가 아니다.

우리는 기록을 하면 자꾸 성과를 기대합니다. "감정 노트를 열심히 쓰면 금방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저는 아직 자신 있게 "그렇습니다"라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감정 노트를 쓰기 전과 후를 비교하면 이제 예전만큼 제 감정을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안이 몰려오면 '또 쓸데없이 예민해졌네'라고 스스로 비난하기보다 '뭔가 중요한 걸 앞두고 있구나'라고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서운할 때는 '또 유난 떤다'라고 눌러버리기보다 '내 안에서 존중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울리고 있구나'라고 달래줍니다. 노트에 글자를 남기는 일은 결국 '오늘 하루 동안 느꼈던 마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겠다. 조금 귀찮더라도 한 번은 제대로 들어주겠다.'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한 줄, 두 줄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예전보다 나는 나를 조금 더 믿게 되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밤, 작은 메모지라도 있다면 오늘 한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그때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떠오른 생각과 행동은 무엇이었는지 적어보면 어떨까요.


그 한 줄이 쌓이면 언젠가 나만의 감정 노트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노트는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나와 나의 대화'가 되어 줄 것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indunf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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