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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Feb 22. 2021

사랑하고 믿고..
신호를 놓치지 마세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머더: 이웃집 살인 사건] 리뷰

우리는 가족과 친구, 이웃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상대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르고, 굳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며, 함께 즐길 만한 식당을 찾을 수 있다. 섣부른 짐작은 경계해야겠지만,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자세로는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없을 테다. 


SNS 덕분에 짐작은 더 손쉬워졌다. 이제 막 결혼한 친구가 활짝 웃는 셀카와 근사한 데이트 코스 등을 하루가 멀다하고 올릴 때면 생각한다. ‘아주 깨가 쏟아지네 그려.’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되도록 멀리한다. 타인의 행복을 의심할 필요가 있나, 악취미도 아니고. 


하지만 바로 그 친구가 전화해 엉엉 울며 결혼이 파탄났다고 말했을 때, 나는 SNS의 무용함을 새삼 깨달았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시작된 마찰은 신혼 여행에 가서 정점을 찍었으며, 심지어 폭력 사태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언어로 펼쳐진 난투극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밀어붙인 인생 최대의 선택이었으므로 그녀는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속이는지, 타인을 속이는지도 알 수 없는 몽롱한 상태로 끊임없이 포스팅을 올렸다는 것.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일상을 공유하는데 쓰이는 SNS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타인의 행복을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불편해졌고 내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에도 흥미를 잃었다. 나는 내 삶을 미래의 '좋아요' 없이, 실시간으로 더 깊이 누리기로 했다. 그 순간 같이 있는 사람과 함께.  


그러나 인정하자. SNS로 타인의 삶을 짐작하는 것이 가당치 않지만, 함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던데, 옛말 가끔 틀리지만 이 말은 옳은 듯하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아메리칸 머더: 이웃집 살인 사건>을 보며 또 한 번 소름끼치게 실감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아메리칸 머더: 이웃집 살인 사건> 스틸컷 @넷플릭스


우선, 이건 실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게 아니라 실화 그 자체다. 등장하는 모든 영상과 메시지는 경찰과 언론이 촬영한 것과 피해자의 가족과 친구들이 제공한 것이다. 피해자인 섀넌 와츠는 자신의 일상을 SNS에 올리며 많은 이들과 공유했고 영화 역시 그녀가 찍은 동영상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어린 두 딸의 엄마이며 머지 않아 태어날 셋째를 임신 중이다. 굴곡진 인생에서 남편 크리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을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꼽는 섀넌. 그녀가 SNS에 올린 사진과 영상에는 한줌의 불행 없이, 사랑과 행복만이 가득해 보인다. 우리네 SNS가 그러하듯이. 


그러던 2018년 8월 13일, 사건 발생일이다. 섀넌은 출장을 마치고 새벽 2시 경 귀가한다. 출장 기간 내내 그녀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 걱정한 친구 니콜이 여러 번 연락을 했으나 응답이 없다. 걱정으로 집까지 찾아온 니콜은 경찰을 부르고 뒤이어 섀넌의 남편, 크리스가 도착한다. 


경찰이 보는 앞에서 종적이 묘연해진 아내에게 연락을 취하며 걱정을 표하는 크리스. 한 이웃은 그의 행동이 이상함을 감지한다. 


영화는 다음의 문장으로 끝난다. 

“매일 3명의 여성이 미국에서 현재 혹은 전 파트너에게 살해된다. 

 자식과 파트너를 살해하는 부모는 대개 남성이다. 

 이런 범죄는 사실상 항상 사전에 계획된다.” 


범죄자를 사이코패스로 몰아붙이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할까. 그들에게 중형을 내리는 것으로 과연 사회는 평화로워질까. 리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소년들에게 폭력이 전수되는 방식에는 뭔가 고심해볼 만한 문제가 있다”(p59)고 말한 바 있고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나는 폭력성이 남성에게만 존재하는 특질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자랑스럽지 않지만, 여성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가해와 피해가 명백히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더욱이 개인의 일차적인 안전망이 되어야 할 가정 내에서 그러한 일들이 벌어진다면, 이는 결코 무시할 만한 일이 아니다.


사건 발생 직후 SNS에서는 뜨거운 논란이 계속 되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섀넌을 나르시시스트라고 명명하며 잘못이 그녀에게 있었을 것이라고 함부로 단정했다고.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찼는지 그녀의 가족들에게 비난과 조롱, 무시와 음해까지 쏟아 부었다니 몸서리가 처진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게 된다. 말로써, 글로써, 나 자신을 표현하다 보면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도 적지 않게 등장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때마다 끊임없이 나의 윤리를 돌아볼 일이다. 누군가를 아프게 하거나 조리돌림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편, 가해자의 어머니가 법정에서 한 진술 역시 인상 깊다.

"무엇이 우리를 오늘로 이끌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우린 널 사랑하고 널 용서한다, 아들아.”


누군가의 죄로 하루아침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과 이웃이 되야 했던 이들. 그들이 모자이크나 음성변조도 없이 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놀랍다. 나라면 내 죄가 아니라 해도, 살인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 내 모습이 나오는 것을 좀처럼 허락할 수 없을 듯하다.


낭만적인 시각인지는 몰라도, 그들의 마음엔 이 작품이 의미 있게 만들어지고 소비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모두의 용기 때문에라도, 이 사건이 한순간의 호기심으로 소비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또 한 가지. 이 영화로 인해 등골이 오싹해졌다면 폭력 예측의 전문가로 소개되는 개빈 드 베커의 저서 <서늘한 신호>를 권하고 싶다. 그는 내 안의 생존 신호에 집중할 것을 권한다. 그것은 두려움일 수도 있고, 불안, 의심, 예감, 호기심 등 어떤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을 믿고 싶은 것 역시 생존의 욕구일 테다. 그러나 누구도 살인이나 폭력을 예상하며 가족이나 이웃을 택하진 않았음을 명심하자. 매순간 의심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 의혹이 생기면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우리가 왜 이런 것까지 생각해야 하는지 참담하지만, 폭력은 현존하고 있음을 기억할 일이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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