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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Feb 18. 2021

아무데나 던져진 양말..
내 남자를 오해할 뻔했습니다

자격지심으로 헤맨 며칠.. 답을 찾았습니다

남편이 1년 여간의 집콕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곳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전 직장을 그만둔 뒤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일찌감치 이직이 확정된 덕분에 꽤 긴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 한 번 못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지만 노는 것도 질린다 말할 때쯤 새 직장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간 하루종일 함께 있는 것에 지친 적도 있지만 나름대로 재미를 찾고 즐기던 참이었다. 삼시세끼를 함께 짓고 먹는 것을 숙제가 아닌 놀이로 바꿔나갔다. 남편은 몇 가지 요리에 능숙해졌고 내가 재택근무로 바쁠 때는 식사 준비를 도맡기도 했다. 청소와 설거지도 갈수록 손발이 척척 맞아 즐겁기까지 했다. 


그렇게 1년 넘게 내내 같이 있던 남편이 출근하고 나니 집이 어쩐지 휑해 보였다. 홀로 남은 첫날은 오랜만의 고요에 눈물이 핑 돌았을 정도. 멀리 떠난 것도 아니고 아침에 출근했다 저녁에 퇴근하는 것이니 이렇게 주책맞을 수 없다. 이런 내가 우스워 혼자 울다 웃기도 했는데, 어쩌나. 낭만은 딱 거기까지였다.


남편, 왜 변한 거야?

▲  남편의 사소한 행동들이 눈에 들어왔다.                  ⓒ pixabay


매일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홀로 아침을 짓는 것은 조금도 억울하지 않다. 출근 준비에 바쁜 그가 함께 하기에는 무리이며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재생산노동’을 기쁜 마음으로 하기 위해 전일제 근무 대신 프리랜서를 택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살림과 뒤치다꺼리는 다른 일 아닌가. 


남편의 사소한 행동들이 눈에 들어왔다. 퇴근 후 벗어둔 양말이 아무 데나 굴러 다녔고 주말에 먹고 난 과자 봉지와 맥주 캔이 식탁 위에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집에 함께 있을 때까지만 해도 비닐과 캔은 깨끗하게 씻어 잘 말리고 분리수거까지 하던 그였다. 이제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건가.


그의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다 울화가 치밀었다. 집에 같이 있을 때는 함께 살림을 돌봤지만 이제 돈을 버니 모든 것은 내 책임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 혼자 경제활동을 할 때는 왜 같이 살림을 했던 건가.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 적이 없다. 혹시 수입의 많고 적음이 문제인 걸까. 


이런 의문은 내가 많은 돈을 벌어들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남들 공부할 때 공부했고 또 취직했지만, 전문직의 멋진 커리어우먼은 되지 못했다. 대체로 그런 내 자신을 비관하고 때로는 사회적 문제라고 주장하고 싶기도 하지만, 나는 이 상황 속에서 내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남편의 퇴사와 새로운 시작을 명랑하게 응원한 것도, 그가 경제활동 없이 1년 간 편안하게 쉴 수 있었던 것도, 얼마 되진 않지만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내 수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부부가 소박하게 저축을 하며 나름 건실하게 가계를 유지하는 것에는 내 공이 크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 모든 구구한 설명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우리 부부를 단지 경제적인 공동체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 역시 단지 경제적 유불리에 입각해 나와의 결혼을 결정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서로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아닌가. 


책으로 나를 돌아보다

@pixabay


여성환경연대가 기획하고 쓴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에 따르면, 프랑스의 철학자 앙드레 고르는 삶의 활동을 세 가지로 정의했다고 한다. 첫째는 경제적 필요로 하는 타율 노동, 즉 임금노동이며, 둘째는 개인의 욕구와 상통하는 자율 노동, 마지막으로 청소나 가계 유지와 같은 자활노동이다. 


그는 자율 노동은 늘리고, 타율 노동을 줄이며, 그로 인한 소득 감소는 자활노동을 늘림으로써 보충해야 한다고 말한다. 타율 노동에 계속 잠식되면 소비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자활 노동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또 다른 이들을 타율 노동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건 딱 내 이야기 같았다. 


전일제 근무로 맞벌이를 하던 때 우리는 잦은 외식을 했다. 사 먹는 음식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요리를 할 의욕이 없었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최소한의 살림을 유지하는 것도 즐거움보다는 어쩌지 못해 하는 숙제처럼 취급했다. 모든 맞벌이 부부가 이런 것은 아니겠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한계였다. 


갑작스러운 입원으로 병가를 내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회사로 복귀하지 않을 것을 고민했고 남편은 내 선택을 지지했다. 긴 대화를 통해 우리는 수입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퇴사 후, 나는 이른 아침의 식사를 기쁘게 차릴 수 있었고 남편은 늘 적극적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물론, 남편이 주된 경제활동을 맡고 아내가 살림과 부업을 하는 지나치게 관습적이고 가부장제적인 삶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자문은 나를 끝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하지만 한쪽에 일방적으로 생계의 의무를 지울 생각은 없으며 무엇보다 나는 현재 처한 상황 속에서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다. 


우리에겐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 

▲  좁게는 함께 행복을 일구는 삶의 동반자로서, 넓게는 환경과 사회를 고민하는 괜찮은 사회 구성원으로 나는 존재하고 싶다.                  ⓒ pixabay


남편이 아무데나 벗어둔 양말, 치우지 않은 맥주 캔에서 갖게 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여기까지 왔다. 웬만해서는 싸우지 않는 우리 부부지만 다툼을 각오하고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는데, 웬 걸. 결론은 허망하다. 이 모든 시작과 끝에는 나의 초라한 자격지심이 있었을 뿐이니까.


내가 양말과 맥주캔을 언급하기 무섭게 그는 또 깜빡한 것은 없는지 집안을 둘러봤고, 앞으로의 주말 식사를 오롯이 책임지겠다고 자처했다. 즉, 그 역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 내게 모든 것을 떠넘기려 한 적은 없다. 하는 일의 양과 종류는 달라도 그 역시 살림의 주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런 그가 더없이 고맙고, 그 역시 내게 한없이 고마워한다. 서로의 역할과 존재 자체를 고맙게 여기는 것, 내가 꿈꿔 온 결혼이란 이런 것이다. 시시때때로 낭만과 현실을 조율해야겠지만, 그와 부부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음이 행복하다. 


모든 것이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나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비난하면서도, 누구보다 그 체제에 물든 것은 내가 아니었나 싶다. 타인을 수입의 많고 적음에 따라 우러르거나 무시한 적은 없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서는 큰 돈을 벌지 못하는 내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하해 온 건 아닌가.


나는 소비자로서의 내 가치를 입증하길 원하지 않는다. 좁게는 함께 행복을 일구는 삶의 동반자로서, 넓게는 환경과 사회를 고민하는 괜찮은 사회 구성원으로 나는 존재하고 싶다. 불필요한 자격지심을 내려놓고 이제 더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



오마이뉴스 기고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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