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황작물 Mar 23. 2021

나를 구할 당신을 찾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투 더 본', 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찾아요

수년간 일기장처럼 사용해 온 비공개 블로그가 있다. 그간 쓴 글 중 ‘죄책감’을 검색하니 꼭 150건. 기쁨과 슬픔, 우울과 즐거움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 내친김에 '성공'과 '실패', 생뚱맞은 '식사'와 '운동'까지 검색해 보았지만 그 어느 것도 죄책감을 이기진 못한다. 죄책감으로 숨 쉬는 인간답다.


이런 말을 하면 나 착한 인간이오, 과장되다 못해 거짓으로 도배된 광고라도 하는 것 같다. 전혀 아니올시다. 내가 얼마나 악랄한 인간인지는 내가 잘 알고 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으며 혹시 어디 가서 손해라도 보는 건 아닐까 수없이 계산기를 두들겨대는 치졸한 인간이다.


그것뿐인가. 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 두 눈을 질끈 감는 사람이다. 약삭빠르게 핑계를 먼저 만들어대며 내가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없는 열 가지 이유를 순식간에 대는 사람이다. 그런 인간이 착하긴 개뿔.


하지만 이 역시 한 줌의 진실이다.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우울하다는 친구의 호소 때문에, 밥을 굶는 아이들의 존재 때문에, 일하다 목숨을 잃는 이들 때문에,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아픔 때문에 쉽게 흔들리고 매일 불행했다. 이상하지만, 모든 것이 내 잘못 같았다.


얼마나 잔인하고 비합리적인가. 타인의 고통을 도울 마음은 없으면서 그 앞에서 내가 아프다고, 내 마음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슬픔을 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람객이 되긴 싫다는 생각이 들자 한 술 더 떴다. 세상의 불행을 모르고자 애썼다. 나는 힘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러니 날 좀 내버려 둬, 제발.


그런 내 자신을 좋아하긴 힘들었다. 누군가를 사랑해도, 사랑받아도 죄짓는 기분이 들었다. 늘 거짓말하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행히, 이제 조금은 안다. 내가 잘못된 사고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나는 무기력함에 젖어든 나머지 그것을 방패 삼으려 했다.


길게 돌아왔지만 이제 나는 다른 길을 택했다. 비이성적인 자기 연민은 그만. 타인의 불행에 마음이 쓰이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을 한다. 부정한 기업의 물건을 사지 않으며, 한 끼 식사비 밖에 되지 않는다 해도 뜻이 맞는 곳에 기부를 하고, 내 곁의 사람에게 더 다정할 것을 다짐한다.


알량한 자기 위안일 수 있지만 나는 이 방법이 더 마음에 든다. 타인의 불행도 외면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내 행복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행복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 마음 하나를 먹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


영화 <투 더 본>을 보며 잊었던 나를 보았다. 톨스토이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의 아픔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지금부터 행복하겠다는 결심, 나도 행복해도 된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 다짐이 간절한 이들과 공유하고 싶은 영화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지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영화 '투 더 본' @넷플릭스


주인공 엘런은 지독한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 생명이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앙상한 몸이지만 여전히 음식을 거부한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코에 영양관을 삽입한 적도 있지만 상황은 악화되어 가기만 한다. 수시로 팔뚝의 굵기를 체크하고 남몰래 윗몸일으키기를 계속하는 그녀다.


영화 초반부, 나는 그녀를 조금 삐딱하게 바라보았음을 고백한다. 아무리 현시대가 술뿐만 아니라, 다이어트 권하는 사회라 해도 이건 좀 지나친 것 아닌가. 마른 몸으로서 그녀가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그건 스스로를 해치는 것은 물론 자라나는 소녀들에게도, 전 사회적으로도 부정적이지 않나.


그러나 이내 내 시야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나의 모든 사고와 행동은 하나 같이 건강하며 사회적 이익과 부합하는가. 무엇보다, 아픈 사람에게 그 고통의 정당성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다. 타인을 향한 내 시선을 점검하자 엘런의 이야기가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이물감 없이 들려왔다.


그녀는 독특한 방식으로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으로 알려진 의사, 베컴을 만나게 된다. 그가 주선한 가족 상담에서는 엘런이 처한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식구들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엘런의 병을 바라보며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소리 높여 주장한다. 이기심이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지만 구해줄 수 없었다는 자책 때문일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엘런에겐 이 모든 것이 버겁다. 자신 때문에 싸우는 가족들 앞에서 그녀는 이렇게 읊조릴 뿐이다.

“난 사람이 아니라 골칫덩어리였네요.”


그녀는 베컴이 주관하는 집단 재활 센터에 들어가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그곳에는 이른 나이에 성취를 이뤘으나 좌절하게 된 무용수, 식이장애를 앓는 임산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엘런이 그곳에서 겪는 일들과 그 후의 변화들은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그래서 더 훌륭한 드라마가 되었다.


스포일러 대신, 이것만 짚고 싶다. 그 아무리 뛰어난 의사도, 사랑하는 가족이라 해도 우리를 구할 수는 없다는 것. 우리를 자기혐오와 죄책감, 무기력감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명 아닌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정답, 자기 자신 말이다.


베컴은 이렇게 말한다.

“넌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것뿐이야. 그런 태도로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경험도 얻지 못해.

 누군가가 나타나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리지 마.”


영화 후반부, 엘런이 엄마와 함께 치른 기묘한 의식도  영화의 백미다. 실소와 눈물이 동시에 터져 나왔는데 단연 눈물이  오래 지속되었다. 나는  영화  편으로 주연 배우인 릴리 콜린스의 팬이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자신의 열혈 팬이 되기를  강렬히 자처하고 싶다.


문득, 앞서 언급한 내 블로그에서 ‘행복’이라는 두 글자를 검색해 보았다. ‘죄책감’을 누르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한다. 어느새 내 화두는 이쪽으로 옮겨 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정말,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 무기력한 죄책감이 아닌, 건강한 책임감과 함께.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나라는 것을 잊지 않을 일이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한 연인의 격렬한 싸움, 과하게 몰입해서 보고 말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