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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Sep 09. 2021

아름답지 않아도 그때의 최선이었죠

[리뷰] 영화 <최선의 삶>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다. 초등학교 때였다. 같은 반이지만 친하지 않은 아이가 먼저 나서서 책을 빌려주었다. 거듭 사양했지만 재미있는 책이니 꼭 읽어보라며 놓고 가는 것을 거절하지 못했다. 빨리 돌려주고 싶었던 나는 쉬는 시간마다 꺼내 읽었고 체육 시간이 되어 교실을 나섰다.  


돌아와 보니 책은 온데간데 없었다. 혹시나 해서 서랍과 가방까지 모두 뒤져 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친구가 말없이 가져간 것으로 알았다. 물건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던 나는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 보다, 좀 더 빨리 읽었으면 좋았겠다 아쉬워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건 오직 내 입장이었다. 그 아이는 기가 막혔을 것이다. 얼마 뒤 다가온 친구는 책을 돌려달라고 했고 당황한 나는 긴 설명도 없이 책이 없어졌다고만 했다. 화가 난 친구에게 뒤늦게 자초지종을 말하며 사과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괴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친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노려 보며 책을 내놓으라고 했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도, 쉬는 시간에도, 집에 갈 때도 쫓아와 말했다. ‘내 책 내놔. 남의 책을 가져가서 안 내놓고 뭐 하는 거야? 당장 내놓으라고!’


하굣길엔 늘 눈물 바람이었다. 사과도 했지만 친구가 받아주지 않는다고, 책을 돌려줘야 하니 사달라고 엄마에게 애원했지만,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아이들 일을 돈으로 해결하면 안 된다고 여기셨는지, 이것이 내게 좋은 교훈이 될 거라고 보셨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생뚱맞지만, 우리 모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책을 잃었던 그 아이도, 나름의 방식으로 육아를 했던 엄마도, 자격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나 역시, 모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선생님께 분실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고 친구에게 양해를 구한 뒤 용돈을 모아 보상을 해줬어야 한다고 요목조목 내 잘못을 짚어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기도 하지만, 그건 나중에야 할 수 있던 생각이다. 


그러니 나의 최선이라는 것은 고작 열심히 괴로워하는 것뿐이었지만 최선이 늘 정답은 아니지 않던가. 나는 내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해 버텨냈음을, 지금은 알고 있다. 

영화 <최선의 삶> 포스터 @엣나인필름

영화 <최선의 삶>은 임솔아 작가의 원작 소설로 먼저 만나보았다. 펼치고 나니 도무지 덮을 수 없는 흡인력 강한 소설이었는데, 영화 역시 그러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끝까지 느껴졌다. 나의 청소년기는 비교적 순탄했지만 십 대인 세 주인공은 남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이 뚜렷하고 제 오점을 용납하기 힘든 소영.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또 다른 고통을 받아들이며 자기 최면까지도 불사하는 아람. 초라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강이. 모두에게서 나를 보았다. 


이들은 가출을 감행한다. 옴짝달싹하기 힘든 구속복이자 최소한의 안전망이기도 한 집을 벗어난 세 소녀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살길을 모색하며 서로를 보듬지만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세 명의 우정에도 균열이 생긴다. 


나는 이들의 선택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없었다. 살아갈수록 타인을 남김없이 이해하겠다는 것은 오만이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거듭 느낀다. 나도 가끔 나를 이해할 수 없는데 타인이 어찌 나를 이해하겠으며 그 역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나. 


다만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하며 내 한계를 인정하는 법을 배워나갈 뿐이다. 이해할 수 없음을 수용하며 아주 조금은 확장되어 가는 나를 느낀다. 나라는 사람의 폭이 넓어지게 될 때 가장 득을 보는 것은 다름 아닌 나다. 이 모자라고 마뜩잖은 나를 조금씩 더 받아들이게 되니까. 


영화를 보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지만 큰 위로를 받기도 했다. 나는 내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으니. 철이 없는 탓인지 몰라도,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의 나도 돌아보았다. 잘하려고 했을 뿐인데 돌아서면 후회할 것이 쌓여 한숨 쉬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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