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단순해져야 한다. 남의 생각까지 간파하려고 들 필요는 없다. 남들의 생각은 남들에게 맡기자. 정답이 있다 해도 확신할 수 없으며 내 능력으로 바꿀 수도 없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된다. 이직을 원하면 입사 지원을 한다. 연인이 싫으면 헤어진다. 그게 시작이고 끝이다.
둘째,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만 생각한다. 어제의 비참한 나도, 내일의 초라할 나도, 한 시간 전의 우울한 나도 떠올리지 않는다. 지금 바로 이 순간만 생각한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외로우면 전화하고, 피곤하면 잔다. 할 일이 없으면 청소를 한다. 그 순간에만 집중하면 1분 전보다는 호흡이 편안해진다.
셋째, 정치적 올바름은 잠시 접어두고 세계의 고난을 떠올린다. 타인의 불행에 위안을 얻으라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불행을 자초하지 않았음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음을, 그것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가치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넷째, 생각의 고리를 끊는다. 불행을 자처하는 사고를 멈춘다. 쉽지 않은 일이므로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리기를 하거나, 몰입도가 높은 책을 읽거나, 떡밥이 가득하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드라마를 보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뛰고, 읽고, 본 뒤 무념무상으로 깊은 숙면을 취하자.
몸과 마음에 달콤한 휴식을 선사한 뒤 맑은 정신으로 깨어났다면, 샘솟는 에너지로 문제를 냉정하게 바라보자. 나는 왜 불행한가? 국적, 성별, 인종까지 바꿀 수 없는 문제란 없다. 시간이 걸리거나 어려울 뿐이다. 첫걸음을 떼는 방법이 무엇인지만 골몰하자. 다리에 힘을 줘야 하는가, 허리를 곧추세워야 하는가.
이때 부정적 사고가 다시금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무의미함의 늪에 빠진다면, 아직 재충전이 완료되지 않았음을 상기하자. 곧장 첫째로 돌아간다. 단순해지자. 내가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미래는 나중에 생각한다.
불행과 행복을 떠올리면 변영주 감독의 <화차>가 떠오른다. 왜 사람을 죽였냐는 질문에 차경선(김민희 역)은 말한 바 있다. 행복해지고 싶었다고. 살고 싶었다고 말했다면 나는 그녀를 더 깊이 보듬고 싶어졌을 것이다. 몸서리쳐지는 지옥에 살고 있던 그녀를 누가 연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의 행복에만 몰입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끊겠다고 마음먹고 실행한 것에는 쓴맛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나의 행복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불행의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는 위험할 수 있지만 행복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도 권하고 싶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행복한 세상은, 정녕 가능할 것인가.
누군가 반드시 불행해야 한다면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불행한 대로 사는 것도 의미가 있다. 얼마나 근사한가. 적어도 포기하지 않았으니. 또한, 행복하지 않음도 수용할 수 있는 자의 여유에, 더 큰 불행은 침입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한동안 불행을 잊고 살았다. 딱히 불행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비교를 거두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누군가 던진 '행복해지는 방법'이라는 화두에, 잊고 있던 몇 명의 인물들을 떠올렸다. 죽고 싶다던 친구, 사는 게 영 재미가 없다던 온라인 이웃 등등.
객관적인 이유나 병적인 우울이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이 불행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핵심일 뿐. 그들의 불행을 떠올리자 나의 행복 지수는 약간 낮아졌고 누구도 순수하게 홀로 행복해질 수 없음을 상기했다.
내친김에 전화로, 댓글로, 따뜻한 말 한마디씩을 건넸다. 어쩌면 이것은 조금도 가닿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오늘 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갈 뿐. 대수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아주 조금은 더 살 만하게 해 준다고 믿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글을 쓸 때부터 훈훈한 마무리를 계획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무리수를 한 번 던져볼까. 행복해지고 싶은 자여, 일단 한 번 써보자. 읽히지 않는다 해도 무용하지 않다. 내가 써놓은 글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고 그곳에는 뜻밖의 선물이 있다. 남에게는 하찮아도 나에게는 귀한 발견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