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에서 겪은 경보 오발령 소동...양치기 소년 떠올라
오늘(31일) 새벽 6시 40분쯤, '위급재난문자'가 울렸다.
"[서울특별시] 오늘 6시 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0여분 뒤, 째지는 듯한 경보음이 또 한 번 울렸다.
[행정안전부] 06:41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 사항임을 알려드림"
한창 깊은 잠을 자고 있던 친구는 소스라치게 놀라 경기를 할 뻔했단다. 뿐인가. 큰 소리에 놀란 아이를 달래느라 평화로운 아침은 물 건너가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이런 가정이 어디 내 친구뿐이랴.
나는 그 시간에 이미 깨어 있었지만 놀란 건 매한가지였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 나름의 긴 고민 끝에 긴급재난문자와 안전안내문자를 꺼둔 상태였다. 누군가는 안전불감증이라며 비난할지 모르지만, 나는 내 몸만큼이나 중요한 정신 건강을 지켜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경보음은 내 일상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한 번 놀라면 손발이 떨려 일도 할 수 없었다. 겨우 진정시켜도 머지않아 비슷한 경보음이 또 들리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내 스마트폰은 재난문자 수신을 받지 않도록 설정되어 있으나 우렁찬 경보음이 울렸다.
귓전 울린 날카로운 소리... 무딘 메시지
그 시각, 나는 한창 헬스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러닝머신 위에서 시속 10킬로미터의 속도로 뛰다가 경보음에 놀라 다리가 휘청거렸다. 얼른 정지 버튼을 눌러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으나 까딱 잘못했으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얼른 내려와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난감해하고 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귓전을 울리던 날카로운 소리와 다르게 메시지는 명확하지 않고 무디기만 했다. 대체 무슨 일로 경계경보를 내린 것이고, 대피 준비를 어떻게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도통 알 수 없었다.
모호한 메시지 때문이었을까. 서로 눈만 멀뚱멀뚱 바라보던 사람들은 다시 하던 운동을 재개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찜찜한 마음은 거둘 수 없었다. 이러다가 참변을 겪기도 한다고, 안전불감증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뉴스를 수백 번은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메시지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해도 옳은 행동 지침을 알 수 없었다. 나 혼자 피하면 되는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짐도 내팽개치고 땀에 절은 몸으로 당장 뛰어간다 해도 집까지 적어도 10분은 걸리는데 길은 안전한가? 여기가 더 안전한 것은 아닌가?
꺼림칙한 마음으로 운동을 재개한 지 10분쯤 뒤, 다시 같은 경보음이 울렸다. 이전에 보낸 것이 오발령이었노라고. 나는 더 이상 운동을 할 의욕이 생기지 않아서 평소보다 이르게 중단했다. 그리고 집에 오는 길엔 객쩍은 생각을 했다. 혹시 오발령이 또 오발령이었다고 문자가 오진 않을까?
경보 이유라도 밝혔으면 난처함까지 느끼진 않았을 것
시민의 안전을 위해 보낸 메시지리라 믿는다. 의도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나의 안전을 배려받고 있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공권력에 의해 나의 하루를 침해받았다는 느낌뿐. 스마트폰 설정을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울리는 메시지 역시 강한 영향력을 실감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좀 더 섬세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간략하게라도 경보의 이유를 밝혔다면 이렇게 난처함만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대피할 준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준비에서 실행은 어떤 단계를 거치게 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사전에 미리 알려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학교에서는 위기 상황시 대피해야 할 장소와 행동요령을 가르친다고 한다. 하지만 비상시 노약자들을 돕고 싶은 나는, 지금 당장 대피하라는 문자가 오더라도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모른다. 이런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각, 포털사이트와 국민재난안전포털까지 마비되었던 것은 다들 영문을 몰라 우왕좌왕한 것일 테니(관련기사 : '경계 경보' 오발령, 책임 떠넘기기... "이런 문자가 국민에게 재난" https://omn.kr/245m0).
이 와중에 서울시와 행안부는 재난문자 발송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행안부는 "서울시 경계경보 오발령은 행안부 요청에 따른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서울시는 "오전 6시 30분 행안부 중앙통제소에서 '현재시각, 백령면 대청면에 실제 경계경보 발령. 경보 미수신 지역은 자체적으로 실제 경계경보를 발령'이라는 지령방송이 수신됐다"라며 "상황이 정확히 파악되기 전에는 우선 경계경보를 발령하고, 상황 확인 후 해제하는 것이 비상상황 시 당연한 절차"라고 밝혔다.
책임 소재를 가리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아침을 맞은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은 원인을 찾는 것이 먼저 아닐까.
서울시가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서도 여러 궁금증이 생긴다. 그토록 시급한 상황이었고, 긴급할 때는 먼저 경보를 발령하는 게 당연한 절차라면, 왜 서울시만 시민들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일까? 백번 양보해 서울 이남은 북한과 거리가 좀 떨어져 있다 해도, 그 외 지역은 어떠한가. 서울에 인접했으나 더 북쪽에 사는 내 친구는 분통을 터뜨렸다.
누군가는 오발령이 될 위험이 있다 해도 안전을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바라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양치기 소년의 우화가 떠오르는 것은 나뿐인가. 나는 정부가 보내는 메시지를 신뢰하고 싶다. 그러나 이런 식은 곤란하다. 부디 정부를 믿게 해 달라. 국민의 안전과 일상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오마이뉴스 기고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