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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Dec 10. 2023

한국말을 잘 못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남편은 언어의 마술사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도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그는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주인공을 알리오와 올리오라고 말해 나를 기함하게 했다. 그 아름다운 영화 속 주인공 이름이 마늘과 기름이면 너무하지 않겠나. 궁합이야 잘 맞겠지만서도. 


어떤 주말에는 내게 말했다. 니가 좋아하는 라파엘 먹으러 가자고. 팔라펠을 좋아한 죄로 나는 졸지에 대천사 라파엘을 즐겨 먹는 여자가 되었다. 


라파엘 아닌 팔라펠 @pixabay


영화 <맘마미아>의 주인공이 그의 입을 거치면 '사만다 아이프리드'가 된다. 혹시 눈치채셨는지? 그녀의 이름은 아만다 사이프리드다. 그를 만나기 전엔 한 번도 헷갈려 본 적 없지만 이제 나도 헷갈린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 봤음을 고백한다.


한 번은 캐시워크 앱에서 '호호바씨오일'이 퀴즈로 출제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정답을 말해줬지만 그는 계속해 오답이라 했다. 그의 스마트폰에 입력된 글자는 "호호밭씨오일". 호호밭이 대체 뭐냐고 웃음을 터뜨리며 정답을 다시 불러줬지만 그는 또 오답이란다. 그가 이번에 쓴 것은 "호호박씨오일". 그의 창의력에 감탄하다가 문득 본 적도 없는 그 식물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 대단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몹시 아파 입원한 적이 있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까지도 열이 내려가지 않아서 뜬눈으로 끙끙 앓고 있었는데,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비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뭐하는 건가 싶어 내려다보니 그가 소시지를 까먹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내가 째려보자 화들짝 놀라며 그가 하는 말,

"심심해서... 천하무적이 있어서..." 

나는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건 천하장사라고. 


그는 아버지의 호리호리한 체형이 아닌, 어머니의 통통함을 쏙 빼닮았다. 흔히 말하는 외탁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한 번도 뵙지 못한 그의 외가 식구들이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초에 아버지 유전자도 그에게 있겠지만 외가 역시 그런 유전자들을 갖고 있다는 게 아닌가. 


내가 너 역시 큰 키와 날렵한 몸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짚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에겐 그런 유전자가 없다는 것이다. 왜? 자신은 엄마를 빼닮았으므로. 성장기도 애저녁에 지났고 노화로 쭈구러들지만 않으면 다행인 이때 아무 의미 없는 대화이긴 하나, 우리는 유전자 이야기로 실랑이를 벌였다. 


내가 유전자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하자, 그는 말했다. 

"뭐야. 우리 이러다 다윗까지 들먹이겠다?" 


웃음이 터져 먹고 있던 음식을 뿜을 뻔했다.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을 말하려고 한 것일 테니. 그런데 곁에 있던 언니가 웃음기 하나 없이 물었다. 너 교회 다녔냐고. 다윗과 골리앗을 어찌 아느냐고.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이 이런 것이렷다. 그는 다윗을 말한 게 맞다고 우겼지만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그를 나는 꽤 오래전부터 사랑했다. 토익 만점자이자 높은 수준의 영어 회화를 구사하지만 모국어를 자주 틀리는 이 남자와 그의 실수들을 기막히게 알아내는 나의 조합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실수가 잦다는 인식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고. 나로서는 그게 더 놀랍다. 


남의 잘못에도 나의 잘못에도 관대해 매사에 둥글게둥글게를 시전하는 이 남자, 누구의 잘못에도 예민해 어떻게든 더 나아지고 싶어하는 나.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그럴 수도 있지"이고 내가 자주 하는 말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이다. 우리는 서로를 보완한다. 함께 할 때 행복은 더 선명해진다. 


그러나 그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살림을 합치는 것까지는 자연스러웠지만 굳이 결혼을 할 이유는 없다고 느꼈다. 예식도, 웨딩드레스도 싫었고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어 어색한 역할놀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비혼을 결심한 적은 없지만 결혼을 고려하진 않았다. 동거는 어려움이 많다는 조심스러운 조언도 들었지만 우리는 넘치도록 행복했으므로 그다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랬던 우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다. 그가 해외 현장으로 발령받아 몇 년간 떨어져 지내던 때였다. 일 년에 네 번, 겨우 2주씩만 연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슬프고 애달픈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 내가 병으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의 회사에서 현장에 함께 오는 가족들을 지원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긴 고민 없이 혼인신고를 했고 법적 부부가 되었다. 얼마 뒤, 나는 우즈베키스탄의 지방 소도시로 향했다. 


만약 그때 해외 생활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우리는 지금쯤 부부가 되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동거 중이었을까. 뭐가 됐든 그와 헤어진다는 가정은 해본 적 없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의 삶은 녹록지 않았으니... 그때의 이야기들을 해보려고 한다. 더 휘발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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