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운전자의 눈에 보인 세상
운전을 하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았지만 미처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차가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단단한 강철에 비하면 한없이 연약한 내 육체는 허구한 날 다치고 멍들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지지만 차는 그렇지 않다.
미세한 마찰에도 상처가 나고 돈을 들이지 않는 한 결코 원상복구 되지 않아 계속해 내 실수를 상기시킨다. 덕분에, 자연계의 모든 것들에 새삼 경이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동물도, 식물도 그 생명력이 감격스럽다. 우리는 기어코 복원되고 어떤 방식으로든 생명을 주고받지 않던가. 기계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 우습게 보이느냐 하면 전혀 아니올시다. 수많은 차들이 신호 체계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통행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내 눈앞에 펼쳐진 이 문명이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문명이 지향해야 할 대상이고 비문명이 그 반대란 생각은 없지만 도로 위에서만큼은 문명 예찬론자가 되고 만다.
물론 문명에 대한 감격을 한 순간에 깨뜨리고 마는 무법자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아직 초보라 욕보다는 당황이 앞서지만 멀찍이서 바라볼 때면 나도 모르게 욕이 장전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남성형 명사를 쓰게 된다는 것도 놀라운 점이었다. 운전자라고 전부 남자일 리도 없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괜한 억울함에 사방의 차들을 '언니'라고 호명하기 시작했다가 뜨악해지기도 했다. 어딜 가나 나이부터 밝히며 서열을 정해야 하는 한국 문화에 불만을 갖곤 했는데 나 역시 이 문화에 젖어 있던 것이다. 운전 선배라고 반드시 연장자일 리는 없다. 좋게 포장하자면 하대가 아닌 존중이었다고 말할 순 있겠지만.
운전을 진취성이나 자유로움과 연결시키는 경우도 있던데 이 또한 그렇게 단순화할 순 없을 듯하다. 내 지인 중에는 운전 경력이 나의 꼭 두 배이지만 단 한 번도 동네를 벗어나지 않은 이가 있다. 그녀에게 운전은 오히려 발목을 붙잡는 수단이 된 지도 모른다. 집과 어린이집, 마트 주변을 맴돌게 하는. 그것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연장은 쓰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운전 덕분에, 사람들의 성격이 천차만별이라는 것도 수시로 느낀다. 실수를 하고 민폐를 끼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별 거 아닌 일에도 수시로 비상등을 켜며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하는 이들도 있다.
남뿐인가. 이런저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일 때마다 겁 많고 비난에 예민한 내 성격을 다시금 확인하기도 한다. 욕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남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도 자랑할 일이 아니다. 조금 더 무던해지리라 수시로 마음먹는다.
무엇보다 달라진 점은, 운전을 한 뒤부터 죽음을 자주 상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로에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사체들이 있다. 시내 주행을 할 때는 볼 기회가 드물지만 아주 없는 것도 아니며 고속도로와 국도, 시골길을 모두 이용해 시골에 다녀올 때는 반드시 보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되도록 시선을 피하려 하지만 한번 피어오른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떠올리는 것은 막연한 죽음이 아니다. 내 사체다. 길가에 버리든, 어쩌든, 나와는 무관한 일이니 아무렇게나 편한 대로 처리하라고 말하곤 했지만 참 생각 없고 무책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산 자의 편의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급적 환경에 해가 덜 되는 방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매장도, 화장도 생태계의 입장에서 보자면 좋은 일이 아니라던데. 관이나 방부처리 없이 자연매장하는 것이 진정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일 텐데 내 몫의 땅 한 뙈기 없을 뿐 아니라 있다 해도 법에 저촉되지나 않을지.
이런 말을 하면 별 이상한 생각을 다한다며 흘겨보는 이들도 있지만 천만의 말씀.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이라 먼 미래를 걱정하며 벌벌 떨지만 그중에는 벌어질지 아닐지 확실하지 않은 일이 태반 아니던가. 하지만 죽음은 확실하다. 좀 더 명랑하게 자주 이야기하고 종내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뜻하지 않게 마주친 죽음들은 그 사실을 내게 알려준다. 넌 결국 시체가 될 거라고. 그러나 죽음 이전에 삶이 있노라고. 길에서 죽어간 생명들의 영면을 기원하며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상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