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걸치고 있는 옷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고매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럴 눈썰미가 없다. 초등학교 때는 파자마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예정에 없던 상담을 받았다. 선생님은 자꾸만 엄마가 집에 계시냐고 물었고 나는 어리둥절한 채 계속해서 잘 계신다고 했다. 장난기 많은 엄마와 언니는 내가 그러고 가는 걸 알면서도 키득대며 나를 보냈었다. 지금 관점으로는 아동 방임의 경계겠지만 그때는 뭐, 야생의 시대였다.
그뿐이겠는가. 나는 몇 달 다니지도 않은 유치원에서 받은 가방을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들고 다녔다. 'OO유치원'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진 그것을. 동네 어르신들은 나를 볼 때마다 칭찬을 하고 또 하며 당신의 자녀들에게 나를 보고 배우라고 했다. 저 착한 아이를 보라며. 그래도 그때는 몰랐다. 내가 뭘 입고 메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편하면 장땡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자꾸만 목이 춥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열심히 안 춥다고 대답했다.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그들은 약간의 노출이 있는 내 상의가 거슬렸던 것이다. 내가 노출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나보다 체구가 작았던 언니 옷을 아무 생각 없이 입다 보니 좀 그랬다. 내가 잘못한 걸까. 피해자는 언니 한 명일 텐데 그녀 아닌 다른 이들이 말을 보태곤 했다.
패션 쪽으로는 이보다 둔할 수 없지만 눈치는 아주 없지는 않아 골치가 아팠다. 무념무상으로 나왔다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파악하고 오싹함을 느끼는 일이 반복되니 무척 피곤했다. 튀려고 튀는 거면 좋겠지만 튀고 싶지 않았으니 문제였다. 나는 결코 튀고 싶지 않았다. 유치원 가방을 들었던 때도, 가슴골을 노출했던 그때도, 단 한순간도.
그래서 이십 대가 되어서야 기술을 연마했다. 남들 눈에 거슬리지 않는 무난한 옷을 입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 뒤부터는 옷으로 말썽(?)을 일으킨 적은 없다. 심지어 옷 잘 입는다는 소리도 몇 번 들었으니 이 모든 영광을 언니에게 돌릴 뿐이다. 언니 옷 중에는 특이한 것이 많았지만 나는 그중 눈에 띄지 않는 것,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 칠순이 넘은 평범한 남자 사람도 신경 쓰지 않을 무난한 것들만 골라 입었다.
이십 대에 연마한 기술은 잠시 써먹을 만했으나 나는 다시 내가 되었다. 재택근무를 하고 사람을 일상적으로 만나지 않으니 더욱 심해졌다. 신발은 바닥이 닳아야 사고 옷도 망가져야 산다. 지나가다 보니 예뻐서, 기분 전환하고 싶어서, 유행이 바뀌어서 뭔가를 사본 적은 내 인생에 없다. 그런 감각 자체가 없으니 어쩌겠는가.
한때는 이런 내가 부끄럽고 못마땅했지만 이제 그대로 수용한다. 다행이라 여기기도 한다. 어차피 지구에 해만 끼치고 갈 것 같은데 그나마 덜한 부분이 하나는 있어서. 다들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대로 선하게 살려고 하지 않겠나. 나는 의류 폐기물에 관한 한 그나마 덜 죄스러울 것 같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 나 역시 결백하진 않겠으나.
이런 인간이니 남들 옷에 관심이 있을 리가. 눈에 잘 들어오지가 않는다. 누군가 회사에 망사스타킹을 신고 와도, 레깅스 입고 출근한 동료에 관해 떠들어도, 늘 늦게 알아챘고 한 발짝 뒤에 있었다. 도마 위에 오르는 이는 대개 여성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뒤에는 지긋지긋한 미소지니와 소비 자본주의 등 거대한 배경이 자리함을 알게 되어 뜨악해지기도 했지만 그걸 알기 전이나 후나,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옷은 내게 헤어진 남친의 점심 메뉴 같은 거다. 관심 없다.
하지만 이런 나도 움찔하는 순간들이 있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지하철 역사 내 계단을 부지런히 올라가고 있는데 앞서가는 여성의 팬티를 보았다. 평소의 나라면 그런가 보다 했을 것이다. 본인이 추구하는 바가 있겠거니. 원한 바가 아니라면 안타깝지만 지나친 오지랖이 오히려 무례 아니겠는가. 내 눈을 돌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팬티와 함께 내 눈에 띈 것은 날개였다. 까만 팬티에 달라붙어 있는 하얀 생리대 날개 한 쌍. 자세히 보려는 의사는 없었으나 내 위치에서는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앞을 보고 계단을 오를 뿐이었고 그녀의 엉덩이는 내 시야에 딱 들어왔다.
당황스러웠다. 패션 무식자인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이것도 패션인 것인지, 아닌지. 여성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외모를 매끈하게 관리하고 생리현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쉬쉬하다 못해 쉬하면서도 소리가 나지 않게 물을 내려대는 것이 속상하던 차에 이런 당당함, 칭찬받아 마땅한 것인가. 아니면 그냥 밤새 이불 킥할 실수였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복잡해지면서도 나는 본능적으로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 내 뒤의 사람들은 그녀의 날개를 보지 못하도록 방패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녀 주위로 나 외에도 두 명의 여자가 다가왔다. 아무런 소란 없이. 그러나 분명한 발걸음으로. 셋이 된 우리는 마치 일행처럼 계단 끝까지 함께 걸었다.
나도 꼰대가 되어 버린 것일까. 혹시 사회적 편견을 뛰어넘고 힘차게 날아오르려는 그녀의 날개를 붙든 것은 아닐까.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장마로 인해 우중충했던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이 또한 작고 기묘한 연대는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타이틀 배경: Image by Roy Stephen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