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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황작물 Jan 19. 2021

아이 잃은 고통,
그 누가 위로할 수 있을까

이해하지 못해도 곁에 있겠다 다짐하며 [리뷰] 넷플릭스'그녀의 조각들'

더이상 난임은 있어도 불임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 의학 기술의 발달로 돈과 결심, 둘만 있으면 아이는 어떻게든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위로라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 참 복장 터지게 하는 말이 분명하다.


가까운 지인 중에 끝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분이 있다. 그녀는 조금 더 노력하면 잘될 거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을 갈라 내보이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얼마나 더 많은 호르몬을 맞아야, 얼마나 더 많은 난자를 채취해야,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을 참아야 충분한 노력이 될 수 있는 것이냐고.


어떤 이들은 요즘은 아이 없이 사는 것도 괜찮다는 심심한 위로를 건네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이들은 별 탈 없이 가진 아이가 있거나, 적어도 본인들이 선택한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나의 지인은 아이 없는 삶을 택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 앞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벌 서는 아이가 된 마냥 가만히 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혹시 그 중 내가 한 말은 없을까 조용히 곱씹으며 나의 경솔함이 그녀의 슬픔을 더하지 않기만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넓고 따스한 가슴으로 그녀의 고통을 누구보다 절실히 공감 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요. 비출산을 결심한 나는 그녀가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이도 저도 다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어쩌란 말인가. 나의 침묵은 배신이었다. 


우리는 어디까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겪지 않아 모른다는 것은 게으른 핑계는 아닌가. 같은 경험을 해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살아오는 내내 뼈저리게 느꼈고, 그로 인해 몹시 외로웠다. 우리는 이렇게 영원히 독자적인 섬으로 살 수밖에 없을까. 


<그녀의 조각들>은 자꾸만 잊는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타인의 위치에 설 수는 없으나 그 위치에 서 보려는 노력은 할 수 있다고. 또한 누군가 왜, 어떻게, 얼만큼 ‘합당하게’ 아픈지를 따지는 것보다 아프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할 수 있다는 것도. 


<그녀의 조각들> 포스터 @넷플릭스


줄거리는 간단하다. 병원의 편의가 아닌, 아이에게 맞춰진 출산을 하고 싶어서 가정 분만을 택한 마사. 진통이 시작되었으나 원래 오기로 했던 조산사가 다른 이의 분만으로 오지 못하고 에바가 오게 된다. 그러나 험난한 진통 끝에 출생한 아기는, 이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마사도, 남편 숀도, 그녀의 엄마도,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상황을 이겨내려고 한다. 마사는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회사에 가지만 젖과 분비물이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녀는 24시간 온몸으로 아기가 떠났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는 당사자다. 


남편은 사인을 알고 싶어한다. 현대 의학조차 이를 명확히 밝혀낼 수 없다는 것에 분개하는 숀. 그는 이 슬픔의 당사자인 동시에, 외부인이다. 아내가 아이의 시신을 의료용으로 기증하려 하자 이를 말리며 오열하는 그는, 그녀가 흐르는 젖을 말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한다. 


마사의 엄마는 정의를 바로 잡고자 한다. 그녀 자신이 홀로코스트 속에서도 살아 왔듯이, 그녀의 딸도 이 모든 고통을 꿋꿋하게 이겨내길 바란다. 그러려면 죄 지은 자를 엄단해야 하므로 조산사는 법정에 세워져야 하고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녀는 숀을 설득해 조산사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다. 


나는 앞서 줄거리는 간단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실은, 가슴이 덜컹했다. 어디 영화에만 그랬겠는가. 언제나 타인의 고통은 이토록 간단하고 나의 고통은 구구절절 복잡했다. <그녀의 조각들>은 그런 내 행적을 돌아보게 만든다. 


빛도 보지 못한 아이가 죽었으니 감독의 의도만 있다면 얼마든지 눈물을 쏟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파를 욕하면서도 쏟아지는 내 눈물은 늘 가볍고 쉬웠으니까. 그러나 이 영화는 값싼 눈물을 자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에게서 한 걸음 물러설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 


나는 누구에게도 감정을 온전히 이입하지 못하고 제삼자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니 끊임없이 그들을 내 잣대로 판단하려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누구의 실수인가.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나. 그리고 이내 그런 내 자신을 뜨악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그게 다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잘못한 자가 있다면 죄를 물어야 하지만 그것으로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픈 이들은 각자의 속도와 방법대로 그 자리를 살아야 한다. 언제까지, 어떻게 아플 것인지 묻는 것은 잔인한 질타다. 이해하지 못해도, 한 발 물러서 있어도, 서로가 그저 익숙한 자리에 있어 주는 것은 어떨까. 


나는 비출산을 결심한 바 있다고 말했다. 우리 커플은 이를 매우 진지하게 숙고했고 결정했다. 하지만 어른들의 만류 앞에서, 모든 언론이 저출산을 하루빨리 타개해야 문제로 수없이 지목할 때마다, 배우자와 내가 같은 무게를 느끼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삶의 짐은 모두에게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잇는 다리를 연결할 수는 있다고 본다. 마음을 내어 주는 것. 기다려 주는 것. 각자가 자신의 속도대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 물론 고통스러운 자는 스스로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써야 할 것이다. 영화 속 마사가 사과 씨앗에서부터 영감을 얻은 것처럼.


영화 내내 그렇지만 길게 할애된 출산 장면 역시 배우 바네사 커비의 진가를 보여준다. 실제 출산 경험이 없다지만 흡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우리가 연기자는 아니고 삶도 영화는 아니지만, 이해나 공감 역시 노력으로 조금은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본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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