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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a May 25. 2016

빨간 모나미 0.7

마흔 살 여자의 빨간 일기장

 


빨간색 볼펜을 좋아한다.
 

유년시절 골목길 뛰다 넘어져 생긴

깨진 무릎 위에 덧바르는 빨간 약 아린 냄새가 난다.

겁먹은 토끼의 빨간 눈동자를 닮았다.

목욕탕 구석 등짝 맞아가며 벌겋게 비벼대는

거친 이태리타월이 얄밉다.

바가지 머리에 뻥튀기 손에 든 채 무심히 바라보던

빨간 주름치마 빨간 입술  하얀 다리 예쁜 여자아이가 되고 싶다.

손바닥 하나 훌쩍 커버린  남동생의 아귀 진 주먹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갈색 파마머리 분냄새 풀풀 거리는 엄마가 타고 나간

빨간 제미니 자동차가 지나간다.

샤워하고 나오는 아빠의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가 울고 있다.



빨간색 볼펜을 좋아한다.

누런 똥 종이 네모 이불 뒤집어 쓰고

붉은 잇몸 양껏 드러내며 큰소리로 웃었다.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멋진 애인에게

매일 밤 장미 빛 러브레터를 썼다.

또각거리는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었다.

빨간 양귀비 무늬  선명한 원피스를 사람들이 부러워한다.

힘센 사람들의 칼을 막는 방패에 박힌 빛나는  루비가 되었다.



빨간색 볼펜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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