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ya May 25. 2016

빨간 모나미 0.7

마흔 살 여자의 빨간 일기장

 


빨간색 볼펜을 좋아한다.
 

유년시절 골목길 뛰다 넘어져 생긴

깨진 무릎 위에 덧바르는 빨간 약 아린 냄새가 난다.

겁먹은 토끼의 빨간 눈동자를 닮았다.

목욕탕 구석 등짝 맞아가며 벌겋게 비벼대는

거친 이태리타월이 얄밉다.

바가지 머리에 뻥튀기 손에 든 채 무심히 바라보던

빨간 주름치마 빨간 입술  하얀 다리 예쁜 여자아이가 되고 싶다.

손바닥 하나 훌쩍 커버린  남동생의 아귀 진 주먹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갈색 파마머리 분냄새 풀풀 거리는 엄마가 타고 나간

빨간 제미니 자동차가 지나간다.

샤워하고 나오는 아빠의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가 울고 있다.



빨간색 볼펜을 좋아한다.

누런 똥 종이 네모 이불 뒤집어 쓰고

붉은 잇몸 양껏 드러내며 큰소리로 웃었다.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멋진 애인에게

매일 밤 장미 빛 러브레터를 썼다.

또각거리는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었다.

빨간 양귀비 무늬  선명한 원피스를 사람들이 부러워한다.

힘센 사람들의 칼을 막는 방패에 박힌 빛나는  루비가 되었다.



빨간색 볼펜을 좋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빨간 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