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책 _ 여름 1] 1990년 그해 여름

by 꿈꾸는세젤이맘


어릴 적 초등학교는 집에서 한 시간 거리였다.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15분, 버스를 타고 20분, 그리고 다시 걸어서 15분, 총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등하굣길을 6년을 다녔다. 7살 때 갑자기, 가끔 얼굴을 봤던 키 크고 얼굴이 까맣던 아저씨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 아저씨가 아빠에게 돈을 빌려갔는데 돈을 갚지 않아 돈을 받는 대신 그 아저씨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라고 했다. 예전 살던 곳에서 약 20킬로 떨어진 시골마을 황등면 정착 2반에 살게 되었다. 학교는 전에 살던 곳 근처로 배정을 받았지만 부모님은 나를 전학시키지 않았다.


정착 2반이라는 마을 이름은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내려와 정착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지명 유래를 듣고 나니 이 동네가 더 시골처럼 느껴졌다. 새로 이사 온 정착 2반 마을은 버스정류장에 있는 큰 대로변에서 1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있었는데 가을이면 황금들녘으로 변하는 논밭과 비포장 시골길 옆에 있는 개울가가 아이들의 주 놀이터였다.


그 당시 버스를 타고 1시간 거리의 학교를 다니는 아이는 드물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논밭과 개울가에는 항상 동네 아이들이 있었다. 잘 씻지 않는 건지 손발은 까맣고 콧물은 항상 반쯤 내려와 있는 아이들이 논밭을 운동장 삼아 공을 차고 비석 치기 놀이를 했다. 소쿠리나 양동이 같은 주방도구가 널브러져 있는 개울가 근처는 미꾸라지를 잡는 아이들로 항상 북적였다.


그 아이들에게 나는 도시에서 전학 온 새침데기 소녀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공부는 좀 한다고 하고 말도 웃음도 별로 없는 나를 처음 본 아이들은 신기한 듯 부러운 듯 그리고 경계하는 듯했다. 동네 아이들에 비해서 내가 입은 옷은 좀 더 비싸 보였고 깨끗했다. 머리카락 한올 내려오지 않게 질끈 묶은 머리와 반짝반짝 윤이나는 구두는 내 눈에도 고급져 보였다.


여름방학이다. 이사 온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1시간 거리의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보다 방학 동안 동네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1990년 그 해 여름방학은 더 반가웠다.


개울가 소녀.jpg



비포장 시골길과 논밭 사이에 있는 좁은 개울가는 항상 아이들로 인산인해였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은 집에 있는 소쿠리란 소쿠리는 죄다 가지고 나가 개울가에서 미꾸라지를 잡고 있었다. 개울가의 폭은 1미터도 안돼 보였지만 무릎까지 걷어올린 바지가 무색할 만큼 땀인지 물인지 모르게 온 몸이 젖어있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저 미꾸라지를 잡아서 뭐하려고 하는지, 아이들에게 그건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미꾸라지는 꽤 잘 잡혔고, 소쿠리는 최고의 고기잡이 도구였다. 개울가 바닥을 발로 연신 담금질을 해대면 진흑탕 물이 일어났고 그 속에 숨어있던 미꾸라지들이 소쿠리에 걸려들었다. 가끔 거머리가 다리에 달라붙어 곤욕을 치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거머리는 숙주에 달라붙은 지 30분 이내에 몸무게의 10배에 해당하는 피를 빨아먹는다고 하는데 아이들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그리고 익숙하게 거머리를 떼어내고 다시 개울가로 들어가곤 했다.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소쿠리를 건넸다. 내가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소쿠리를 받아 들었지만 망설여졌다. 남동생은 이미 물속에서 고기들을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들어가 볼까? 나는 이미 버려도 괜찮을 옷을 골라 입고 나왔었다. 물속에서 발로 진흙탕물을 일으켜 미꾸라지를 잡는 것은 해볼 만할 것 같았는데 미꾸라지를 통에 옮기려면 손으로 미꾸라지를 잡아야 하는데 그건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아이들과 친해지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나도 물속에 들어가고 미꾸라지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이래 보여도 소탈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소쿠리를 들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몸은 쉽게 따라주지 않았다. 발로 담금질을 하는 동시에 소쿠리를 물속에 집어넣어 미꾸라지를 퍼내듯이 잡아야 한다. 소쿠리를 얕게 넣어도 안된다. 소쿠리에 진흑이 적당히 뭍을 정도의 깊이를 가늠해 물속에 집어넣고 빠르게 담금질을 한 후 소쿠리를 들어 올려야 한다. 자꾸만 헛손질이었다. 손과 발에 힘을 더 줘야 한다고 했다. 담금질도 더 깊이, 소쿠리도 조금 더 깊이 넣어야 한다고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미꾸라지 2마리가 소쿠리 안에서 빛의 속도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실패가 거의 없었다. 나는 꽤 미꾸라지를 잘 잡는 아이였다.


모내기 전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의 논바닥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운동장이었다. 축구도 하고 나이 먹기도 하고 비석 치기도 한다. 남자, 여자 아이들이 모두 어울려 축구를 했고 나는 운동화가 없어 구두를 신고 같이 뛰었다.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했고, 하는 김에 잘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나를 경계하는 듯했지만 살며시 틈을 보이며 나를 끼워주었다.






해가 지면 빈 깡통에 구멍을 내고 그 속에 나무와 지푸라기 같은 것을 넣어 불을 만들었다. 그리고 깡통을 철사줄로 길게 매달아 줄을 잡고 돌렸다. 나는 그런 깡통을 만들 줄 몰랐지만 밖에 나가면 항상 누군가 깡통을 줬다. 깡통에 줄을 매달아 돌리기 시작하면 내 키보다 훨씬 큰 동그란 불빛 원들이 장관을 만들어냈다. 불깡통놀이는 옛날 정월 대보름 무렵 성행했던 쥐불놀이가 현대놀이로 변형된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 동네 아이들은 4계절 가리지 않고 재료만 있으면 만들어 돌렸다.


동네 아이들과 이런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건 방학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멀리 학교를 다닌 탓에 나는 학교 근처에 있는 외갓집이나 고모집에서 자주 잠을 잤다. 또 당시 대학교 앞 사거리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수류탄을 던지고 데모를 했던 탓에 버스가 자주 끊겨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에 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밖에 나가지 않고 숙제를 하거나 티브이를 보며 시간을 보냈었다. 아이들이 있을지 없을지 모를 동네로 나갈 용기는 없었고, 먼저 놀자고 연락할 만큼 친한 친구도 없었다. 아이들과 어울릴 수는 있었지만 그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 친해지기는 쉽지 않았다.


방학이든 아니든 시도 때도 없이 어울려 뛰어놀던 그 아이들의 일상이, 나에게는 방학 때만 가능했던 특별한 경험이었다. 마치 도시에 살다 방학 때만 잠깐 친척집에 놀러 온 것처럼 아이들과 어울렸다. 이방인처럼, 낯설게 그렇게 어울렸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에 친정엄마가 살고 계신다. 당시 같이 미꾸라지를 잡고 논밭을 뒹굴었던 아이들도 주말이나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고향집을 찾아온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길가 양옆으로 흐르던 또르르 물소리도, 논바닥을 운동장 삼아 뛰어놀던 아이들도, 밤이 되면 빈 깡통에 철사를 매달아 돌리는 아이들의 모습도 이제는 볼 수 없지만 친정집 마을은 아직도 그때 그 아련한 추억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성장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자연을 벗 삼아 물속에 들어가 흙을 만지고 고기를 잡으며 놀았던 1990년 그해 여름.


매일 마주한 곳이었지만 마치 낯선 곳에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으로 아이들과 어울리며 추억을 쌓아 더 특별했던 나의 여름방학, 그 시간의 기억은 참 애틋하고 소중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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