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책_여름 2]그 여름, 교회 오빠

by 꿈꾸는세젤이맘


1996년 여름, 이제 막 여고생이 된 나는 교회 여름수련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중고등부 학생회라고 해봤자 30명도 안 되는 작은 시골마을의 교회였지만 그 안에서도 회장, 부회장, 총무 직책을 나누어 맡았고, 우리는 같은 동네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쭉 교회에 같이 다녀 서로의 집으로도 허물없이 놀러 다니는 그런 사이었다. 당시 고1이었던 나는 고등부 막내로 주로 임원진 언니 오빠들과 어울렸었다.


그 해도 임원진을 중심으로 여름수련회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쯤 여름수련회는 연합수련회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전도사님과 회장 오빠는 우리와 비슷한 규모의 교회 3-4개가 참여하는 연합수련회에 참석 가기로 결정했다. 규모가 비슷하니 3-4개의 교회가 모여봤자 100명 남짓일 것이다. 성경말씀도 배우고 친목도 쌓기에 적당한 규모라고 생각했다.


연합 수련회장은 어떤 기도원이었는데 대부분의 기도원이 그렇듯 건물 전체가 산에 둘러싸여 있었고 대예 배장과 식당, 숙소가 있었다. 기도원에서 조금 내려가면 꽤 넓은 계곡이 있었는데, 물도 성인 허리까지 찰 정도로 적당히 깊어서 물놀이하기 딱 좋은 계곡이었다. 17세 소녀는 수련회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그렇게 궁금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허락된 3박 4일간의 여행이었고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언니 오빠들과 즐겁게 놀다 가면 그만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입교 등록을 하고 예배가 시작되었다. 차분히 앉아 전도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문쪽에서 어수선하게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도착한 김제지역 교회 학생회팀이라고 했다. 20명도 안 되는 것 같았다. 힐끗 보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하얀색 폴로티에 감색 반바지, 오뚝한 코, 짙은 눈썹, 갸름한 얼굴, 까무잡잡한 피부의 진짜 잘생긴, 누가 봐도 미남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우와~ 연예인처럼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키가 좀 작아 보였지만 내가 지금까지 봤던 남자 중 제일 잘생긴 남자였다.


언니들이 술렁였다.

'우와 쟤 잘생겼다~!! ' '쟤 이름이 뭐야?'

임원진 중 나랑 가장 친했던 인애 언니가 그중 누군가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어랏? 인애 언니가 아는 사람들인가?' 임원진 언니 오빠들은 가까운 김제의 그 교회 학생회와 친분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교회 학생회팀과 어울리게 되었다.







자꾸만 눈이 갔다. 18세라고 했다. 나보다 한 살 위였다. 이름은 H. 보면 볼수록 잘생겼다. 까무잡잡했지만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가 그렇게 세련된 보일 수가 없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학교에서도 전교 1-2등을 다투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외모에, 성격도 좋고, 거기다 공부까지 잘한다고? 전라도 사투리가 적당히 섞인 구수한 말투는 친근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모범생, 잘생긴 그야말로 딱 이상적인 교회 오빠였다.


수련회장을 다닐 때도,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도 내 신경은 오로지 그 H 오빠에게 쏠려 있었다. H오빠를 의식한 나의 말투와 몸짓은 그 어떤 것도 어색했다.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언니들은 모이면 H오빠 얘기뿐이었다. 언니들은 이미 몇 번씩 말도 해보고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나도 친해지고 싶은데... H오빠와 몇 번 눈이 마주쳤지만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점심을 먹고 숙소에서 목사님 딸이었던 현주언니와 잠깐 쉬고 있었다. 고3 현주언니는 이미 H오빠에게 반말을 하며 편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내 맘을 들킬까 봐 언니들에게도 H오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얘기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현주언니가 던진 한마디는 내 인생의 가장 설레는 로맨스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근데 소희야 H가 자꾸 너 보는 것 같더라~



풋풋하고 젊은 남녀가 모인 곳에서 '썸'이 빠질 수가 없다. 교회라고 다를 게 없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와중에 연애도 열심히 하는 언니 오빠들이 많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교회 수련회라는 말에 어렴풋 청춘, 설렘이라는 단어가 같이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 교회는 신성함이란 가면을 쓰고 더 앙큼한 연애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게 무슨 얘기지?


눈이 몇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나한테 말을 건 적도 없었고 신경 쓰일 정도의 시선도 없었다. 현주언니의 말에 잠깐 설레긴 했지만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괜한 기대만 생기는 것 같아 속상하기까지 했다.


현주언니의 얘기를 듣고 내 몸의 촉은 두배로 예민해졌다. H오빠와의 거리가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심장은 더 뛰었고 내 행동은 더 부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H오빠의 시선이 조금 달라 보였다. 눈이 더 자주 마주쳤다. 말을 걸지도 않았고 일부러 내가 있는 곳으로 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느껴졌다. H오빠와 나 사이의 공기는 분명히 뭔가 달랐다.



이 오빠도 나에게 관심이 있다...



그 뒤로 언니 오빠들은 H오빠가 나에게 관심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더 자주 했다. 가장 친했던 인애 언니는 그 교회의 K오빠와 자주 어울렸다. K오빠는 H오빠와 가장 친한 사이처럼 보였고 그들은 모두 18세 동갑내기였다. 인애 언니는 K오빠와 주고받은 대화를 나에게 간간히 전달해줬다.



" H가 자꾸 소희 너에 대해 물어본대..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아"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인애 언니에게 뭐라고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녁 초청 강연 시간이었다. 서울 교회에서 장로님 부부가 오셨는데 두 분이 방송국 성우라고 했다. 내가 좋아했던 만화 영심이에서 나애리 목소리를 연기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아들이 슈퍼탤런트에서 상을 받았는데 이름이 차태현이라고 했다. 슈퍼탤런트? 누구? 학생들이 술렁였다. 차태현이 누구려? 당시 우리는 차태현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나 또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차태현이 누구든 H오빠보다 잘생겼을 리가 없었다. 두 분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배우 차태현의 부모님이었다는 사실만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셋째 날은 등산과 계곡 물놀이가 있었다.

옷차림과 외모에 자꾸만 더 신경이 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예쁜 옷을 준비해 오는 건데... 7부 바지에 하얀색 폴로티를 입고 목에는 빨간색 손수건을 둘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걸스카우트도 아니고 나름 멋을 낸 것이 빨간 손수건이었다.


H오빠와 얘기를 나눌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내가 말을 건다는 것은 언감생심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고 말 걸어 올 기회를 만들어줘야 했다. 지금까지 상황으로 봤을 때 H오빠도 그렇게 대범한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안타깝지만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나 심하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성격이거나 둘 중 하나 같았다. 가능하면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으려고 했다. 나의 응큼한 배려였다. 와라.. 와라...


등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

H오빠와 K오빠가 뒤따라 오는 소리가 들렸다.

" 어? 소희야 안 힘들어?~~" K오빠였다.


그리고 우리 셋은 천천히 등산로를 따라 수련회장까지 걸어왔다. K오빠와는 간간히 대화를 이어갔지만 H오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오후 물놀이 시간이다. 계곡물은 시원하게 넘쳤고, 맑았다. 바위에 걸터앉기도 하고 물속에 발을 담그기도 하면서 같은 교회 사람들끼리 모여 시간을 보냈다. 오빠들은 언니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물을 먹이는 게 그렇게 재밌는지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언니들을 들어서 물속에 집어던진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끌려오는 언니들도 있었다.


건너편 물가에 H오빠 교회 사람들이 보였다. 등산 후 물놀이라 그런지 모두들 시원한 계곡물에 몸을 담그며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H오빠가 없었다. 내 눈은 빠르게 주위를 탐색했다. 보이지 않았다. 들어갔나?


그때 수풀 그늘이 드리워진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는 건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 다시 물놀이를 즐기는 척했다. 이쪽을 계속 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보고 있었다. 대놓고... 나만... 보고 있었다....


마지막 넷째 날, 폐회예배 시간이 돌아왔다.

수련회 가간동안 H오빠와 얘기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다. 사람들과 같이 섞여 대화를 나누기는 했어도 단둘이 대화를 주고받은 기억은 없다. 이제 돌아가면 끝이다. 연락처도 모른다. 애가 탔다. 아 어떻게 하지? 연락처를 달라고 할까?


예배 시간은 유난히 짧았다. 목사님은 할 말이 저것밖에 없으신가, 다른 날은 설교도 길게 하시더니.. 예배당 의자에서 엉덩이가 떨어지질 않았다. 그때였다. 인애 언니가 나에게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


"H가 연락처 알려달래"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고 나는 무선호출기 '삐삐'도 갖고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집 전화번호를 알려줬고, 삐삐는 몇 개월 뒤 구입했다.


집에 돌아와 H오빠의 연락만 기다렸다. 우리는 자꾸 어긋났다. H는 부모님이 전화를 받을 까 봐 자유롭게 전화를 못했고, 어렵게 전화를 해도 꼭 집에 없을 때 전화를 했다. 첫 통화가 연결이 됐을 때 그의 목소리는 구수하게 다정했다.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색함 속에 굉장히 설렜던 그 아날로그적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나는 기숙사에 들어가게 됐고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던 H오빠는 졸업도 하기 전에 천안으로 취직이 되어 그때부터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H오빠는 글씨도 너무 예뻤다. 이렇게 글씨를 잘 쓰는 남자는 분명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정자체로 바르게 꾹꾹 눌러쓴 글자들이 분홍빛 편지지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편지는 3-4번 정도 주고받았던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H 오빠는 내가 기숙사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공부에 방해된다며 연락하기를 굉장히 어려워했다고 했다. 내가 부담을 느낄까 봐 조심스럽고, H오빠에게 나는 과분한 상대라고 했다고 한다. 생각보다 진지했고, 필요 이상으로 나를 배려했다.


한적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시골소년과 도시 소녀의 청순하고 깨끗한 사랑을 담고 있는 황순원 작가의 그 소설 제목은 '소나기'다.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소나기일까, 아마도 소설 속 소년소녀의 순수한 사랑이 잠깐 내리다 그치는 소나기와 같은 짧은 사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3박 4일간의 여름수련회, 전화통화 2-3번, 주고받은 편지 3~4통, 이것들이 H오빠와 나의 이야기 전부다.


H오빠와의 추억은 짧은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쏟아진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강렬했다. 강렬했던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몇 장면은 선명하고, 몇 개의 설렘은 지금도 생생하다.


한여름의 소나기와 같았던 교회 오빠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그렇듯, 순수하고 싱그러운 그래서 아련한 나의 첫사랑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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