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책 _ 여름 3] 엄마의 동상이몽 여름휴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 카피는 나의 부재로 발생할 불편한 상황들에 대한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지금 당장 가방을 싸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휴가는 누구에게나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한 나 자신에게 주고 싶은 보상의 시간이다. 일상에서 결핍된 무언가를 채울 수 있다는 희망도 품게 한다. 특히 여름휴가는 1년 중 가장 기다리는 이벤트 중 하나다. 올해는 누구와 어디로 여름휴가를 갈까? 생각만 해도 설렌다.
20대의 여름휴가는 우선 마련된 여행경비 한도 내에서 계획을 해야 한다. 여행경비가 조금 부족해도 큰 불만은 없다. 좋아하는 친구, 연인과 함께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설렘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때이니. 대학교 MT를 떠나는 젊은 남녀들의 싱그러움, 바닷가에 도착하자마자 윗옷을 번어던지고 물속으로 돌진하는 순수한 열정이 터져 나오는 그런 때이다. 'seize the moment, memento mori' 순간을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 이때쯤 나의 미래는 희망적이고 밝아 보이기만 한다. 20대의 휴가는 나에게 주어진 지금 이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맘껏 즐길 수 있는 그런 때이다.
30대 직장인이 된 후 여름휴가는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로워지니 여행지와 숙소를 좀 더 고르게 되고 동반자가 누구냐에 따라 여행 테마도 달라지게 된다. 아직 싱글인 자유를 맘껏 누리고, 생각 있어 보이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해외로 떠나는 걸 보면서 무작정 유럽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맘 맞는 직장동료들과 여유로운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설레고 추억 깃드는 여행도 이때가 적기인 듯싶다
결혼 후 엄마가 된 후에도 여름휴가는 손꼽아 기다리는 이벤트 중 하나. 1-2달 전부터 아이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적당한 휴가 장소를 물색한다. 블로그, 인스타, 맘 카페를 들락거리며 좋다는 여행지는 한 번씩 클릭해보고 내가 가진 경비와 여건을 가늠해보면서 고르기 시작한다. 누구는 어디에 다녀왔다더라, 거기는 경치가 죽이더라, 아이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너무 잘돼 있다더라, 조식이 끝내주더라 먼저 다녀온 엄마들의 이야기에 나의 여름휴가에 대한 기대치도 한껏 올라간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휴가,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 아이들과 함께 차를 탄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기 상어' 동요를 따라 부르며 들뜬 마음으로 여행길에 오른다. 아빠는 운전을 하고 엄마는 앞자리에 앉아 뒷자리 아이들을 돌아보며 간식을 챙겨준다. 아이들은 낄낄대며 장난을 치고 서툰 발음으로 동요를 따라 부른다. 열심히 달려 도착한 숙소는 거실 통창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린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진 바다는 초록빛으로 반짝이다 파란색으로, 파란색이었다 초록빛으로 시시각각 변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발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모래는 어찌나 부드러운지 아이들은 어느새 신발을 벗어던지고 들어오고 나가는 파도와 장단을 맞추며 어울리고 있다. 그늘이 없지만 오늘따라 햇빛이 부드럽다. 바람도 선선하게 부는 게 몸에 달라붙는 짠내도 덜한 듯하다. 엄마는 해변가 파라솔 아래 자리를 잡고 아이스커피 한잔을 든 채 아빠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노을 지는 석양이 창가로 드리운 경치 좋은 횟집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 산지에서 먹는 싱싱한 회는 최고의 맛이다. 한상 가득 차려진 만찬에 아이들도 어른들도 매우 만족하며 불룩 나온 배를 두드린다. 가족들 얼굴에 행복에 겨운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이처럼 완벽한 휴가가 있을까? 너무 행복한, 기대만큼 완벽하게 그려진 여름휴가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완벽한 휴가는 여행 중간중간 다이내믹하고 주접스러우며 번잡스럽고 웃지도 울지도 못할 파란만장한 에피소드들이 쏙 빠졌을 때나 가능한 얘기다.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제시간에 출발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일어나는 것부터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는 것 까지 뭐하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짐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챙겨도 챙겨도 끝이 없다. 결국 예정된 출발시간을 넘겨 가까스로 출발을 한다. 순조롭게 보이던 출발도 잠시, 둘째는 카시트에서 내려오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한다. 간식을 주며 둘째를 달래는 와중에 큰애는 출발한 지 30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언제 도착하냐는 질문을 10번도 더 한다. 차가 생각보다 막힌다. 비행기 출발 시간 1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하는데 네비에 찍힌 도착시간이 50분 전이다. 아슬아슬하다. 어쩔 수 없이 버스전용차선을 타고 달린다. 비행기를 놓치느니 잠깐 법 범행 위를 하고 말자, 눈 질끈 감고 긴장감 속에 파란색 노선을 타고 달려 아슬아슬하게 공항을 도착한다. 공항에서 킥보드를 타겠다고 빠득빠득 우기는 둘째는 결국 킥보드를 타다 넘어져 이마를 다치고 만다. 한 번은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트렁크에 짐을 싣고 아이들을 챙겨 가까스로 출발했는데 캐리어 하나를 주차장에 그대로 두고 출발한 적도 있다.
여행지에서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 멀미를 자주 하던 둘째는 아침부터 먹은 뱃속 음식물들을 모조리 토해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 한복판에서 피난민처럼 카시트, 옷, 물티슈, 화장지, 기저귀 등을 주차장 바닥에 모조리 깔아놓고 뒤처리를 한적도 있다. 둘째가 이제 막 2돌이 지났을 무렵 충북 계곡 근처로 캠핑을 갔다가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내가 다시는 캠핑을 오면 사람이 아니다' 라며 자책하고 후회하는 일도 있었다.
분명 나는 독립적인 자유의지를 가진 손발 멀쩡한 사람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함께하는 여행은 손과 발이 꼭 어디에 묶인 채 끌려가는 것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눈앞에 그림 같은 풍경이 있어도 그 풍경을 감상할 시간은 많지 않다. SNS에서 핫플로 유명한, 그 지역에서 꼭 가봐야 한다는 맛집에 가도 엄마는 배라도 채우고 나오면 다행이다. 아직 말이 서툰 4살 둘째는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밑도 끝도 없이 울고 떼를 쓴며 그때부터 무조건 엄마가 안으라며 매달린다. 엄마의 여름휴가는 휴가를 왔는지 훈련을 왔는지 헷갈릴 정도로 고강도의 육체노동과 정신수양으로 막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엄마가 기대한 휴가의 모습과 현실 휴가의 모습은 달라도 참 너무 다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은 여름휴가를 기다린다. 여름휴가를 통해서 그간의 수고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내가 꿈꾸는 여름휴가가 올지도 모를 기대감도 품은 채 말이다.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집은 의무의 공간'이라고 했다. 이 문장을 읽고 무언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엄마들이 틈만 나면 기를 쓰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건가? 특히 엄마들에게 집은,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해도 해도 티도 나지 않는, 해도 해도 알아주지 않는 의무의 공간이다. 잠깐 숨좀 돌릴 겸 거실 소파에 앉는다. 푹신한 소파가 나를 위로해 주는구나 싶을 정도로 온몸이 힘을 빼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애들 장난감이 눈에 들어오고, 거실장 위에 쌓인 먼지가 오늘따라 더 거슬린다. 그간 냉장고를 열 때마다 애써 외면했던 버릴 음식들도 떠오른다. 작은방 화장실 불이 켜있네, 집 밖에는 택배 상자가 쌓여있다. 저녁 찬으로 해 먹으려면 냉동실에 고기도 미리 꺼내놔야 한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는 시간대별로 해야 할 집안일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몸은 소파에 앉아 있지만 눈동자는 집안 구석구석을 탐색하기에 바쁘고 머릿속은 해야 할 집안일이 자꾸 떠올라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데이비드 실즈> -
엄마들도 일탈을 꿈꾼다. 엄마들도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하루는 지겹다.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엄마들이 꿈꾸는 일탈은 질풍노도 청소년들이 호기심에 담배를 피우거나 가출을 하는 그런 영역을 바라는 게 아니다. 북한에 사는 군인과 남한의 매력적인 재벌 2세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사랑의 불시착 같은 로맨스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냥 엄마의 일상에서 잠깐 벗어나는 것, 수시로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집과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잠깐 벗어나는 것이다.
여행은 의무의 공간인 집으로부터 잠깐 벗어나 크게 숨 한번 들이쉴 수 있게 한다. 손과 발이 묶여 있더라도 눈에 보이는 기막힌 풍경들과 누군가 차려준 맛집 음식들은 엄마들을 간간히 위로하며 울컥과 숨 고르기가 차례로 들어오니 그래도 집보다는 낫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 힐링의 시간이 될지 고행의 시간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엄마들은 여행이 좋다. 엄마라는 역할에 묶인 삶, 동상이몽 여름휴가라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