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책 _ 여름 4] 나의 보물섬
어느 날 새벽 아침, 초등학교 1학년인 큰아이가 언제 일어났는지 작은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내 옆으로 다가와 묻는다.
" 엄마는 공부하는 게 그렇게 재밌어?"
" 어 아들 언제 일어났어? 엄마는 이렇게 책 읽고 공부하는 게 너무 재밌어"
" 근데 이 공부 안 해도 되는 거 아냐? 숙제 아니잖아 잠도 안 자고 이러다 엄마 죽으면 어떻게 해?"
" 어 숙제는 아닌데 엄마는 책 읽는 게 너무 재밌어서 읽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책 읽는다고 죽지 않아 "
책 읽기는 공부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큰애는 잠도 안 자고 책상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면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는 걱정 한가득 표정으로 묻는다.
공부하듯 책을 읽는다.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책은 들고 다니면서 읽는다.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아이들과 남편이 잠든 새벽 5시가 되면 어김없이 나의 작은 서재로 간다. 신혼 때부터 방 하나는 책장과 책상이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결혼 후 5년이 넘도록 책 한 권 읽지 않았지만 막연하게 책 읽고 공부하는 삶을 꿈꾸었던 나, 큰 애를 낳고 약 5년 가까이 방치돼 있던 이 책상은 이제야 독서대, 스탠드가 놓이고 책들이 쌓여있는 공간이 되었다.
갑자기 책에 빠져버린 나를 지켜보던 신랑은 벽 쪽에 배치돼 있던 책상을 창가 쪽으로 옮겨주었다. 7층인 우리 집에서 창문을 통해 아파트 정문과 맞은편 주택단지가 보이고 저 멀리 호수공원도 보인다. 아파트 꼭대기에 걸쳐있는 하늘은 매일 다른 모습으로 그날의 컨디션을 보여준다.
창문을 활짝 연다. 창문을 열고 자기엔 춥고, 닫고 자기엔 살짝 더운 초여름 새벽 공기는 딱 좋게 시원하다. 기지개를 한번 켜고 몸을 풀어준다. 시원한 바깥공기가 몸속으로 들어오면서 몸도 마음도 새 기운을 받아들인다.
아무것도 깨어나지 않는 어스름한 새벽녘, 오로지 스탠드 불빛 하나만 켜고 이 방의 모든 사물이 독서대 위에 있는 책에 집중하게 한다. 아무도 펴보지 않은 새 책, 설레는 마음으로 날 선 첫 장을 넘긴다. 책과 내가 대화하는 시간, 가슴 깊이 울림을 주는 문장들에 밑줄을 긋는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책과 내가 있는 나의 작은 서재, 이곳은 나의 마음치유 상담소이며, 오로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몰입의 공간이다. 타인의 소란스러운 시선도 없다. 이 곳에선 엄마도, 직장인도, 딸도, 아내도 아닌 오로지 '나'로 존재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어떤 공간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스탠드, 책상, 책이 있는 이 작은 공간은 분명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
주말이면 카페에 간다.
카페는 커피를 파는 곳이지만 요즘엔 커피를 마시는 사람보다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카공족.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로 요즘엔 이런 카공족을 위해 아예 1인석 자리를 마련해 놓은 카페도 많다. 내가 자주 가는 H 카페 2층은 아예 카공족들을 위한 공간이다. 한쪽 벽면에 일렬로 자리를 배치하고 칸막이로 구분한 1인석이 8자리 정도 있는데 카페 오픈과 동시에 만석이다.
사람들은 왜 카페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걸까?
우리나라에서 카공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아주 흔한 풍경이었다. 따사로운 햇빛과 맑고 투명한 하늘,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대가 있는 카페의 야외 테라스,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의 손에는 책이나 신문이 들려있다. 여유롭고 자유롭다. 지적이고 아늑하다.
공간의 힘은 강하다.
일의 능률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을까?
공부가 더 잘되는 최적의 장소가 있을까?
공간만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우리는 좀 더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답은 물론 'Yes' 다.
사람들은 개인 취향에 따라 공부를 할 때, 쉬고 싶을 때, 영화를 볼 때, 책을 읽을 때, 커피를 마실 때 최고의 시간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저마다의 공간이 있다.
카페는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최고의 공간이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커피 마시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노트북 자판 소리가 미세하게 섞인 소음은 날 더 편안하게 해 준다. 낯선 사람들이지만 날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드톤의 세련되고 따뜻한 인테리어는 나까지 세련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날따라 유난히 맛있는 깊고 진한 라테는 나의 기분을 한껏 올려놓는다.
앞이 탁 트인, 전망 좋은 카페라면 더할 나위 없다. 전망은 나무와 꽃, 잔디 같은 초록빛이 좋다. 푸른빛이 하얗게 출렁이는 바다와 제주도 산방산 같은 자연이라면 평범한 수식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환상의 시간이 보장된다.
책 읽기에 이렇게 완벽한 공간이 있을까?
카페는 또 하나의 나의 작은 서재가 된다. 공간은 나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나는 책과 내가 존재하는 최고의 시간을 만든다.
만약 쓰는 순간 사라질 수 있는 투명망토가 있다면
무얼 하고 싶으세요?
은둔의 즐거움 _ 신기율
신기율 작가의 '은둔의 즐거움'에 나오는 문장이다. 내가 만약 투명망토를 입고 있다면? 잠시 상상해봤다. 뭔가 짜릿했다. 내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나라는 존재가 보인다. 세상 소란스러운 것들을 남겨둔 채 나는 날아오른다. 그리고 내가 사라진다.
나의 작은 서재, 이 곳에서 나는 투명망토를 입은 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역할에 묶인 삶은 자유를 쫓는다. 망토를 걸친 나는 아무 역할도 없고, 역할에 딸린 의무도 없다. 좀 더 자유로워지니 내가 좀 더 충족된다.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나는 그곳으로 간다. 그곳에 들어서며 나를 지치게 하는 세상의 문은 닫는다. 나를 충전해주고 위로해주는 안식처가 되는 나의 보물섬, 나만의 작은 서재, 그곳에 작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만큼 나는 또 성장한다.
나만의 보물섬에는 투명망토를 쓰고 있는 내가 살고 있다
그곳은 메마른 나를 치유하고 소생시키는 유일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