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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세젤이맘 Dec 27. 2022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브런치 작가가 된 지 2년이 다 돼 가고 있지만 제대로 된 브런치북 한 권이 없다. 글 한편을 완성하기까지 적게는 2-3시간, 많게는 일주일도 걸린다. 그냥 툭툭, 하루에 한편씩 글을 척척 써내는 브런치 작가들이 꽤 많다. 브런치에서 매일 관심작가의 새 글을 알려주는 알림을 받으면 작가들의 새 글을 읽어 내려가다 묘한 질투심과 자괴감이 밀려온다.


아, 나도 쓰고 싶다..


좋아하는 작가의 새책이 나왔거나 인스타에서 책 추천글을 보고 나면 허기짐을 못 참고 허겁지겁 냉장고를 뒤적이는 사람처럼 책을 검색한다. 서평을 찾아보고 리뷰를 다 말고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일단 책을 담아둔다.


신뢰도에 의심 가는 걸 알면서도 서평이나 리뷰를 찾아보는 것은 혹시나 하는 심리 때문이지만 내가 책을 고르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책은 독자가 읽을 때마다 새롭게 완성되는 법이니까.


새책이 도착했다는 택배 알림이다. 퇴근길이 조금은 가볍다. 네모난 종이상자를 뜯고 두꺼운 비닐포장을 커터칼로 긋는다. 오늘은 3권, 노란색 고무줄로 묶어져 있다.


아, 가장 설레는 순간이다.

아무도 펼치지 않는 날 선 책장을 넘긴다. 추천사, 작가의 말 등을 대충 훑는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반드시 삶이 변한다고 한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없다고 한다. 작가가 살짝 던져주는 메시지는 그래 이거지!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다. 


인간의 본성,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내면을 건드려주는 책이 좋다. 위선적인 나의 심연을 바라보게 해주는 책, 다양한 페르소나 속 이중적인 나를 직시하게 해주는 책이 좋다.


이번 책도 나에게 제대로 도끼가 되어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읽을 순 없다. 뜯다만 테이프가 팔랑이는 택배박스가 널려있고 걷는 것보다 뛰는 게 익숙한 아이들이 날아다니는 이런 너저분한 공간에서 저 귀한 책을 읽을 수는 없다. 내일 새벽, 나의 작은 서재에서 스탠드 불빛 하나와 오로지 나와 책만 존재하는 공간에서 읽어줘야 하니까(흐뭇)


새벽 5시, 따뜻한 차 한잔을 손에 들고 서재방에 들어간다.

딸각, 책상 위 스탠드를 켠다. 따스한 조명이 책상을 감싸고 바로 어제 그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와~ 가벼운 탄식과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드는 문장에 밑줄을 그을 때마다 나의 쓰기 욕망이 꿈틀댄다.

그래, 이거야.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이거였어.


글감이 떠올랐으니 어쨌든 노트북을 켠다.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해 본다. 생각들이 하늘 위에 듬성듬성 떠있는 하얀 구름들처럼 머릿속을 떠다닌다. 이제 그 구름들을 모아서 예쁜 하늘을 그리면 되는데 말이 안 나온다. 단어와 문장들이 툭툭 쏟아져 나와야 하는데 막혀도 너무 자주 막힌다.


그래도 쓰라고 하지 않았던가. 글도 엉덩이 승부라고 했다. 질보다 양이라고 했다. 투닥투닥 속도를 내며 써 내려가던 타자의 속도가 멈칫한다. 몇 자 톡톡톡.. 내가 쓰는 문장들을 왜 이렇게 틀에 박힌 것들인지, 좀 기발하고 위트 있고 재밌는 그런 문장들 좀 못 만드나. 한숨 한번 쉬고 저장 버튼을 누른다. 브런치 작가의 서랍 기능은 오늘도 제 기능을 톡톡히 한다.


따뜻한 차 한잔을 넘기며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음악을 골라본다. 그래, 음악을 듣자, 음악은 내 정서를 글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자동입력된 검색어가 뜬다. '책 읽을 때 듣기 좋은 음악' '집중할 때 듣는 음악' 'Soupe asmr', 'Oneplaylist', '네 고막을 책임져줄까'..  음악을 고르다 보니 어느새 10분이나 지났다. 뭐지? 뮤직앱이었는데 어느새 인스타에서 헤매고 있다. 시간이 얼마 없다. 다시 한번 써보자, 음악의 힘을 빌려 다시 한번 집중해 본다.


몇 자 쓰지 못하고 아이들을 깨울 시간이 돼버렸다.

안 되겠다, 예전부터 찜해 둔 카페에 가야겠다.

음악, 커피, 예쁜 것들로 만 채워진 카페만큼 글 쓰기 좋은 공간은 또 없지 않은가. 아직 희망은 있다.


아이들도 없고 귀찮게 하는 남편도 없다.

의무감으로 가득 채워진 집도 아니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카페에 왔다. 어떻게든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무 말이나 끄적대기 시작한다.

너도 천재일지 몰라, 타고난 작가일 수도 있다고, 잠재된 재능을 끌어내 보자.


쓰다 보니 글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것 같다. 또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있다. 나를 위해 쓰는 글이라지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글을 써야 읽어주지, 너만 좋으면 그게 일기지 뭐니. 글태기가 제대로 온 듯 싶은데 이번에도 확 다음(Daum) 메인이나 노려볼까? 다음 메인 노출로 조회수가 폭발하는 것만큼 신나고 흥분되는 것도 없다. 문제는 일시적이라는 것, 언제까지 조회수에 일희일비할 수 없지 않은가   


이번에도 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서 카페까지 왔는데 한 꼭지라도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온다.


안 되겠다.

글이 안 써질 때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다시 읽어 본다. 다시 책이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방탄소년단 RM의 꼭 읽어봐야 할 책 목록에 있던 책이다.

노래든, 시나리오든, 글이든, 인터뷰든 쓰는 마음을 매일 생각하는 9명의 작가들의 사적인 이야기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하나같이 글에 대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었다. 쓰고 싶지 않다고.. 하하하. 작가들도 별수 없구먼. 공감과 위로, 그리고 변명거리가 늘었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전고운 작가님의 글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런 나의 생각이 문제다
쉬운 것은 인정하지 않는 생각
어려운 것만 진짜라고 여기는 생각
결핍과 고통에서 빚어진 게 아닌 글들은 가치 없다고 여기는 생각

-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가볍고 사소한 것은 하찮게 여기는 습성, 뭔가 거창하고 진지하고 남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것만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진지충이 바로 나 아니던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았다. 사고 한번 없었고, 크게 아파본 적도 없다. 약간의 강박과 우울감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누구나 다 있는 거란다. 요즘 핫한 부동산 투자도 잘 모르고 반려견은커녕 동물은 그냥 무섭다. 제주도 한달살이? 공무원 월급에, 나라에 메인 몸으론 언감생심이다. 퇴사?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것은 나 자신이 너무 잘 안다. 육아이야기? 이제 그만해도 된다.


평범한 40대 워킹맘인 내가 과연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삶에 영향을 미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결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내가 왜 글을 쓰고 있는 거지? 글을 쓰지 않는다고 먹고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아직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 케어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 글 안 쓴다고 죽을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글을 쓰면서 더 괴로워한다. 돈도 안 되는, 생산성 없는 이것을 나는 왜 쓰고 있는 걸까


아이들 저녁을 먹이고 집안일을 마무리한 후 고생한 나를 위해 넷플릭스를 본다.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늘어지는 게 없다.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슬슬 졸음이 밀려온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처음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내가 썼던 글은 대부분 결혼과 육아이야기였다.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힘이 되고 권력이 되는 가부장제는 공정하지 못하다고, 한국사회의 모성신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묶인 요즘 엄마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며 글로 맘껏 풀어냈다.


공감해주는 댓글과 재밌다고 읽어주는 조회수는 많았지만 현실에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학습된 남성중심 가족구도가 몸에 베버린 남편도 그대로, 유교문화와 가부장제가 깊게 뿌리 박힌 한국사회도 그대로였지만 딱 하나 변한 게 있었다.


바로 나, 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글을 쓰고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해방감을 느꼈고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단단한 돌덩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제10회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말도 안 되는 브런치북을 만들어 억지로 응모를 하고, 브런치 앱을 하루에도 몇 번씩 켰다 껐다를 반복하면서 알게 됐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안의 결핍을 알아채고 그것을 두 손안에 올려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쓰고 싶지 않지만 결국 쓰게 된다는 것.


나는 결핍을 찾아 성장하고자 하는 내가 대견하다.

나는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좋다.


'A를 원하지만 B에 머무는 삶, 늘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대체제로 만족하는 현실, 하지만 무엇을 마시냐 보다 마시는 행위 자체가 더 중요할 때가 많은 게 삶이니까 그냥 마신다'는 전고운 작가님의 말처럼,


나는 글을 쓴다는 행위 그 자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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