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라 <말의 트렌드>
"말을 줄여 부르는 사람을 없어 보인다고 폄하하기보다는 왜 줄였을까?를 먼저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리고 또 그런 이유로 헤어지는 커플은 더 이상 없기를 바라본다. 비빔냉면보다 비냉이 어쩐지 더 쫄깃하게 느껴지는 줄임말의 마법이 더 많은 사람에게 펼쳐지기를!"
트렌드에 아주 밝지는 않지만 그리 뒤처지지도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너도 꼰대야"라고 한다면 애써 부인하진 않지만 그래도 속으론 '내가 꼰대면 지는...' 하기도 했죠.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하면서 ‘별다줄’(별 걸 다 줄이는) 세태에 꽤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벅, 엘베, 알바, 카톡, 물냉, 비냉, 소폭... 일상적으로 그런 말들 잘 써왔네요.
적어도 '말'에서는 꼰대였구나, 를 자인하게 된 책, 트렌드에 영영 못 미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걸 알게 된 책을 지금이라도 읽어서 다행입니다. 이번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을 책은 정유라 작가의 <말의 트렌드>입니다.
"외국어가 아닌 모국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모국어 어휘력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명백한 자산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오래된 속담이 시사하듯, 잘한 말 한마디는 내 가치를 높이고 사회생활과 사생활에 모두 도움이 된다. 시대적 감수성에 뒤처지지 않은 언어, 독특하고 선명한 언어, 기발하고 재치 있는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힘의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책의 카피부터 목차 하나하나가 꼭꼭 찌르는 느낌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알아먹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저도, 저와 다른 세대, 집단과는 다른 말을 써왔겠죠. 제가 속한 뉴스 만드는 조직에서는 8리, 아리, 낮리, 디리 같은 말을 흔하게 씁니다. 각각 8뉴스 리포트, 아침뉴스 리포트, 낮뉴스 리포트, 디지털리포트를 줄인 겁니다. 취재파일은 취파, 사건사고종합은 사사종... 하다못해 압수수색은 압색, 백브리핑은 백블... 제가 쓰는 말도 있고 아닌 말도 있지만 다른 조직이라면 생소한 말들일 겁니다.
"무배(무료배송), 무나(무료나눔), 택포(택배비포함), 착샷(착용샷)과 같은 줄임말이 친숙하지 않다면 온라인 물물교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학원 스케줄 때문에 매일 편의점 도시락과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해결하는 고등학생에게 편도와 삼김은 일상적이고 친숙한 단어이므로 줄여 부르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렇듯 어떤 줄임말이 익숙하지 않다면 그것이 당신의 일상에 바짝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의 어휘력이 부족해지면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 '문해력의 저하'를 꼽는다. 텍스트의 주제와 핵심을 명확하게 짚어내는 문해력의 결핍이 학습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사람들 사이의 소통까지 방해하는 데 대해 우려하는 시각에는 물론 공감한다. 그러나 소통을 저해하는 우려의 대상이 젊은 세대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다소 부당하다. 과연 우리는 이 시대의 새로운 언어인 밈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젊은 세대에게 문해력이 부족하다면 우리에게는 밈해력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세대가 탄생시킨 문화 콘텐츠를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하는 태도는 인내심과 호기심이다."
작가는 프롤로그를 이렇게 끝맺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언어가 트렌드나 디지털과 같은 수식어에 가려져 있지만 결국은 애정과 사랑의 언어임을 발견했고 그 사실에 매우 기뻤다. 거칠고 삭막하며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게 요즘 말이리자만 모든 언어에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애정이 방울방울 담겨 있다.”
이 말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제가 별생각 없이 하는 말에도, 주로 메신저로 소통하는 말들도, 어찌 보면 꽤 거칠고 삭막하기도 한데 적어도 있는 만큼의 애정은 담아야겠다고, 그게 진부한 이모티콘이든 다른 거든 간에 그렇게 하는 게 저의 '언상'을 더 낫게, 저를 더 자라나게 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어떤 말을 왜 하면 안 되는지, 대다수가 어떤 말을 줄여 부르는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접두사는 무엇인지 등을 종종 고민해 보는 것만으로도 내 밭을 '지금, 여기'의 기후에 알맞게 가꿀 수 있다. "말은 사전이 아닌 정신 속에 살아 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표현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사전을 넘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을 반영한 결과다. '시대정신'이라는 거창한 말 뒤에 숨어 있는 '생활의 감각'을 익혀, 우리의 마음 밭을 새로운 언어로 환기해줘야 한다."
*출판사 인플루엔셜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