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도본부가 IP를 말하기 시작했다

by 내일도무사히

회의실에서 낯선 문장 하나가 흘러나왔습니다.


"이거 IP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드라마나 예능 부서였다면 이미 공기처럼 익숙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나온 곳은 보도본부였습니다. 매일 전쟁처럼 뉴스를 전하고, 팩트를 확인하며, 마감에 쫓기는 기자들이 모인 곳. 그곳에서 'IP'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건 조금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방송사, IP의 맛을 보다


방송사가 IP(지적재산권)에 사활을 걸기 시작한 게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OTT 시장이 폭발하면서 판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에 돈을 쏟아붓는 과정을 지켜보며, 방송사들은 새삼 깨달은 게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것들에 이렇게 거대한 값이 매겨질 수 있구나.'


그전까지 영상 콘텐츠, 특히 방송을 탔던 것들의 수명은 짧았습니다. 본방, 재방송, 그리고 끝. 해외 판권이라도 팔리면 다행인 '소모품'에 가까웠죠. 하지만 플랫폼은 달랐습니다. 10년 전 드라마가 넷플릭스 상단에 걸려 전 세계에서 다시 소비됩니다. '잘 만든 것'은 시간이 흘러도 가치가 증발하지 않는다는 걸 숫자로 확인했습니다.


웹툰이 드라마가 되고, 드라마가 게임이 되며, 콘텐츠가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이 되는 흐름. 그 문법은 이제 상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뉴스는?


IP를 논하는 게 자연스러운 건 예능, 드라마, 영화 같은 콘텐츠들이었습니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고, 팬덤이 존재하니까요. 그런데 뉴스는 어떨까요? 온라인에 발행하고 몇 시간이면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듯한 기사도 IP가 될 수 있을까요?


제가 맡은 팀의 이름, '지식콘텐츠 IP'입니다. 주로 영상 콘텐츠가 많은데 강연, 대담, 심층 인터뷰... 오락보다는 정보와 지식, 통찰에 뿌리를 둔 것들을 다룹니다. 뉴스와 연결은 되지만 기존의 뉴스와는 다릅니다. 누군가는 묻습니다. "그런 게 IP가 되나요? 수익을 낼 수 있나요?"


오히려 지식콘텐츠가 더 단단한 자산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행을 타지 않기 때문이죠.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는 10년이 지나도 그 가치가 유효하지 않을까요. 시대의 지성과 나눈 깊은 인터뷰는 시간이 흐를수록 대체 불가능한 역사적 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가치를, 정말로 관심을 갖고 찾아보지 않는 한, 아무도 볼 수 없는 아카이브에 묵혀두느냐, 아니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느냐가 관건일 겁니다.


*다른 그릇에 담그다


콘텐츠가 한 번 소비되고 휘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릇에 담겨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것. 그것이 IP의 핵심 아닐까요.


기사가 책이 되고, 영상이 강연 커리큘럼이 되며, 취재의 기록이 뉴스레터나 프리미엄 클래스로까지 변모합니다. 낯선 이야기 같지만 이미 현실입니다. BBC는 오래전부터 출판 브랜드를 운영해왔고, 국내에서도 미디어와 교육의 경계는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언론사가 출판사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고, 유튜브 채널과 방송사의 경계도 흐릿해지고 있으며, 강의 플랫폼이 미디어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우리는 뉴스(만) 만든다"는 오래된 정체성으로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좁아지는 시대입니다.


보도본부에서 IP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은 뉴스와 저널리즘이 쌓아온 신뢰와 전문성을 '자산'으로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23년 차 기자인 제가 같은 회사에서 갖게 된 명함의 버전이 이제 여섯 번째쯤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지식콘텐츠IP팀 명함 뒷면에 적힌 진짜 미션은 이것 아닐까요.


"우리가 만든 것은 오늘 소비되고 사라지는가, 아니면 내일의 가치로 살아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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