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 흐르는 고요한 사무실. 몇 대의 모니터 불빛만이 푸르게 반짝이고 있다.
노트북 키보드 위로 힘없이 타자를 치는 손가락, 그리고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어깨는 긴장을 풀 줄 모른 채 굳어 가고 있었다. 며칠째 이어진 야근은 겨우 붙잡고 있던 의식마저 흐릿하게 만들었다. 시계 바늘은 벌써 밤 9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같이 야근하던 차대리를 불렀다.
“차대리, 업무 마무리 아직 안 됐어?”
“아.. 네. 과장님. 조금 남아 있어서 이것만 마무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퇴근하세요.”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일단 밥부터 먹자.”
차대리를 이끌고 회사 근처 식당가로 향했다. 대부분의 식당은 이미 불이 꺼졌고, 유일하게 24시간 운영하는 국밥집만이 골목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쌀쌀한 가을 공기에 따뜻한 국물 냄새가 제법 잘 어울리는 밤이었다.
국밥 한 그릇에 소주 한 병.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회사에 쌓인 울분을 토해냈다. 힘들었던 회사 얘기를 하고 상사 욕도 하며 한잔, 두 잔 술잔을 기울였다.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소주 빈병들이 하나둘 쌓여 갔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내일은 상사한테 할 말 하자”부터 시작해 “우리 조금만 더 힘내 보자”라는 결론으로 끝났고, 비틀거리며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또 하루를 버텨냈다.
다음 날 아침, 머리를 짓누르는 묵직함과 어지러움이 한순간에 밀려왔다. 술 먹은 뒤의 두통약이 간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기에, 약 대신 약국에서 드링크제와 환을 묶어 판매하는 숙취해소제를 털어 넣은 뒤 무기력한 몸을 이끌고 출근길에 올랐다.
어제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와 다짐은 필름이 끊겨 잘 기억나지 않는다. 회사에 도착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고, 여전히 쌓여있는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하루가 또 시작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술은 서서히 깨고 있었지만 지친 몸은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 질 것 같았다.
몇 달간 야근과 음주를 반복하며 몸은 점점 망가지기 시작했다. 술기운을 들키지 않으려 업무에 집중할수록 정신은 더 피폐해져 갔다.
내가 왜 이러고 살지. 무엇을 위하여.
술은 단순히 그 힘든 순간을 회피하고 싶을 때 찾는, 가장 얻기 쉬운 ‘가짜 보상’ 일 뿐이었다. 주말이면 평일에 일했으니 쉬어야 한다는 핑계로 넷플릭스 시리즈를 열 편씩 몰아보며 시간을 허비하곤 했다. 그때는 그것이 나를 위한 휴식이라 믿었다.
하지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대개 우리를 망가트린다.
술, sns, 게임처럼 빠지기는 쉽지만 멈추기는 어려운 것들 말이다.
무기력이 극에 달했던 어느 날 아침. 결국 한계가 왔다.
전날도 과음을 하고 엉망인 모습으로 일어나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초점 없는 두 눈과 넋이 나간 모습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멍하니 거실에 앉아 있는데, 창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저 햇살조차 나를 따스하게 비추는데, 왜 나는 나 스스로를 거칠게 다루고 있었을까.
보상이랍시고 스스로에게 건네던 것들이 사실은 보상이 아닌 자기 학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해오던 모든 것들이 삶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날 이후 국밥집 대신 운동화를 먼저 찾기 시작했다. 운동, 공부는 술처럼 즉각적인 쾌락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시작하기까지가 고통스럽고 과정은 지루하며 결과는 더디게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래서 시도조차 하기 싫어하거나 중간에 포기하곤 한다.
하지만 꾸준함이 주는 도파민은 결이 다르다. 그것은 나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속하게 하는 단단한 힘이 된다. 시작하기는 어렵지만 한 번 성공의 경험을 하면 삶은 멈추지 않고 성장하는 궤도에 올라탄다.
하루의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내 선택이고 그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진다.
5분의 필사, 30분 운동, 30분 독서처럼 하루에 해야 할 일을 잘게 쪼개서 루틴 화하고, 습관이 될 수 있게 꾸준히 이어 가 보자. 불편한 시간은 언제가 우리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준다.
훗날 50살, 60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돌아봤을 때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금 불편한 선택을 한다.
당장은 고통스러울지라도, 결국 나를 살리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