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부여관 그리고 운명의 식당

by 쏘다니기


IMG_1246 복사.jpg 사진 / 고흐가 살았던 라부여관


이 마을 오베르쉬르우아즈는 고흐에게는 정말 중요한 삶과 죽음의 장소였다.

한적하고 조용한 이 시골 마을에는 내가 방문했던 당시 큰 건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5층이 안 되는 건물들이 여기저기 있었던 것 같다. 고흐가 살았던 집은 시청사 바로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청 주변이라서 인지 제법 광장 같은 탁 트인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눈에도 잘 띄는 건물이기도 하다.


라브여관으로 알려진 이 건물에는 이층 창 사이로 고흐가 묵었던 집이라는 팻말이 있고 아래 레스토랑이 있다. 과거의 모습이 크게 변하지 않은 채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2층에는 창문이 있으나 고흐가 묵었던 3층에는 창이 없다. 창이 없다니 정말 답답했을 것 같다. 사람은 창을 통해 햇빛을 받고 창밖에 공기를 마시고 무심코 밖에 풍경을 보기도 하며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것인데. 고흐에게 이 방은 그런 조그만 행복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1층에는 레스토랑이 있다. 고흐도 이곳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IMG_1249.JPG 사진 / 라부여관 1층 벽에 걸려 있는 레스토랑 사진


1층 식당 옆 벽에는 사진이 한 장 걸려있다. 당시 여관 주인의 딸인 아델린이 식당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그곳에 고흐에 대한 그녀의 기억이 스여 있다. 아쉽게도 고흐의 사진은 아니었다.

사진에는 1890년 5월 20일 고흐가 이곳 오베르에 도착했고 그의 하루 숙박비는 3.5프랑이었다는 것과 고흐가 문 옆에 서있는 여관주인의 딸 아델린(당시 13세)의 그림을 그렸다는 설명이 적혀있다. 함께 당시 사람들은 고흐를 존경했고 친근하게 빈센트라고 불렀다는 글이 적혀있다.

고흐에 대해 좋은 인상을 적은 것은 아마도 고흐가 유명해진 뒤에 이 사진이 걸렸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이 식당은 고흐에게 또 하나의 안타까운 사연이 있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곳이다.


오베르에서의 고흐는 생 마리 병원에서 어느 정도 치료를 했지만 가끔씩 발작과 함께 고통이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흐는 이곳 오베르에서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거의 하루에 1점 이상의 작품을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가셰 박사의 도움으로 치료도 잘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셰 박사는 단순히 의사 이상이었다. 형을 걱정한 동생 테오가 당시 예술가들의 친구이자 열정적인 후원자였던 정신과 의사 폴 가세를 만나도록 권유했고, 고흐는 가세 박사를 만나 치료를 받으며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림을 좋아했던 가셰 박사는 고흐에게 위안이 되었고 가셰 박사도 고흐를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흐는 가세박사의 딸을 그리기도 하고 박사의 초상을 남기기도 했다.


가셰박사  고흐.jpg 고흐 / 가셰 박사의 초상


그런데 갑자기 삶의 희망을 놓아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절망에 빠뜨린 이유는 무엇일까? 오베르의 한적한 풍경에 만족하고 가셰 박사도 어느 정도 의지가 됐었기 때문에 폭풍처럼 작품활동에 몰입했던 오베르. 그리고 1890년에는 그가 그토록 바라던 작품 판매가 이뤄지기도 했던 해이다. 물론 단 한 작품이지만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IMG_1268.JPG 사진 / 까마귀 나는 밀밭의 배경이 된 오베르의 밀밭


까마귀.jpg 고흐 / 까마귀 나는 밀밭


1890년 7월 27일 일요일 오베르의 밀밭에서 총성이 울렸다.

고흐는 그 밀밭에서 총상을 입는다.

고흐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로 알려진 '까마귀 나는 밀밭'이 바로 그 총성이 울린 곳으로 알려졌다.


고흐가 직접 자신을 향해 총을 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고흐의 총상에 대한 다양한 설들이 있는 것이다.

그동안 정설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고흐 본인의 자살설이다. 그런데 당시 고흐는 정신병을 치료하고 있었고, 그런 고흐가 주위에서 총을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로 고흐의 자살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자살을 선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총상을 입고 피를 흘리면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끝까지 삶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살설에 의문을 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하나는 타살설이다. 주변에 고흐를 못 마땅해 한 누군가가 그를 향해 총을 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고흐의 총상 이후 발견된 총이나 탄환이 없고 증거가 없기 때문에 역시나 주장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변에서 총기로 장난치던 아이들의 오발로 인해 고흐가 총상을 입었다는 설이다. 고흐가 아이들의 잘못을 굳이 책망하지 않고 용서했다는 설이다. 역시나 증거는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흐는 가슴을 정통으로 맞지 않았고 피를 흘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여관 주인이 의사를 불렀지만 손쓸 방법이 없었고 다음날 테오가 형을 찾아왔다. 고흐는 테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왜 잘하는 게 없지? 스스로에게 총을 발사하는 것 마저도 실패하다니.” 고흐의 삶에 대한 절망과 자책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결국 전해지는 이 말이 고흐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결정적 증거였다.


고흐가 총상을 입었다는 급전을 받고 테오가 찾아왔을 때 고흐는 태연히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음날 정신을 잃었고 총상을 입은 이틀 후 결국 1890년 7월 29일 고흐는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앞에서 사망했다. 37살의 젊은 나이에 사람들의 박수를 받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고흐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운 사연은 하나 더 있었다. 고흐의 장례를 치르려던 가족들에게 더욱 가슴 아픈 일이 생긴 것이다. 장례를 치르려 했던 성당에서 자살했다는 이유로 장례식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결국 고흐의 시신은 그가 살고 머물렀던 그 라부여관 다시 옮겨졌다. 그가 희망을 부여잡고 머물렀던 숙소의 1층 레스토랑 식탁 위에 고흐의 관이 올려졌다. 그리고 그 주위에 고흐가 그렸던 작품들을 둘러싼 채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위가 어떻든 성당에서 마지막 영혼의 안식을 찾으려던 장례식을 거부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종교적 교리와 권위가 한 인간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로하는 장소가 되지 못한다니.


세상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얻고자 하는 마음의 위로가 그런 것이 아닐까.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 중에 하나일 텐데 스스로 선을 긋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는 소외된 이들을 위한 목자가 되고자 했던 고흐는 성당의 가혹한 처사로 그가 머물었던 여관의 식당에서 가족들의 슬픔을 뒤로한 채 떠나가는 신세가 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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