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의 걷기에 대하여

by 쏘다님


손끝 벌겋게 곱아드는 한파 시즌,

유산소의 명소를 아는가?



춥다. 해도 너무.


바닥에 물기라도 있으면, 2초 김연아가 되어야 하고,

(연아님 죄송합니다, 턱수염물범으로 정정할게요)

정면으로 날아드는 바람에 미쓰홍당무도 되어야 한다.

(홍조 치료로 피부과에 상납 중인 '미쓰'는 맞습니다)

걷는 것도 이렇듯 고달픈 일인진대,

경량 패딩 조끼에 레깅스 차림으로

조깅하시는 분들을 보면, ...존경합니다!


하루키가 100%의 여자를 만나는 시즌을

4월로 지정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쯤은 되어야 침낭패션을 벗어던지고,

깔롱진 차림새로 누군가를 만날 수 있겠지.


걷기도 마찬가지다.

공원에 푸릇푸릇함이 회복되고

아.아.를 들어도 손이 시리지 않는,

그때가 되면 드디어 산책이 즐거워진다.



그 전까지는 대책이 필요하다.

아웃도어는 너무 하드코어하고,

런닝머신 위는 너무 단조롭다.

그래서 이곳까지 오게 되는 것이다.


컬러풀한 색채, 조화로운 냄새, 다양한 맛,

오감 만족 겨울 산책 명소, 복합 쇼핑몰.

무엇보다, 휘적휘적 거닐다보면

어느새 5천보는 훌쩍이다.

(절대, 시식코너 때문이 아닙니다)


단장한 디스플레이에서 올해의 컬러를 가늠해보고,

궁금했던 구어망드 향수가 과연 느끼할까 시향해보고,

늘어선 줄 뒤에서 팝업 매장의 인기 비결을 기웃거리다,

결국 결승선으로 회귀한다. 마트다.

(웹소설 속 '회귀'한 미쓰...쪽이 더 흥미로울라나)



또 카레야?


이런 류의 문장을 조합할 줄 모르는 것 아닐까.

동생은 매주 보는 카레에, 매주 감탄사를 뿜어낸다.

몇 달이 지나도 그대로다.

주말 메뉴 중 한 끼는 고정이니, 조금은 수월해진다.


함께 메뉴를 고르고, 만들고, 나누어 먹는 것.

그것 역시, 카레처럼 익숙해졌다.

동생과 나는,

그 외에 서로를 (간지럽지 않게) 위로하는 방법을

아직은 알지 못한다.


'아직은'이라는 단어가 주는

시간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짧은지 통감했지만,

간지럼 알러지에 대한 내성이 약한 오늘은,

아직, 카레다.



카트에 감자랑 양파도 담고,

동생이 싫어하는 당근은 지나치고,

넣으면 맛이 확 살아나는 버터도 챙긴다.

결정적 주인공을 찾아 떠나려는 발걸음을

미확인 메시지 하나가 주춤 붙들었다.


아직 정식 출근은 아니지만,

업무 관련 연락들이 꽤 늘어났다.

전화도, 문자도, 메일도, 카톡도,

벌써부터 80%이상을 점령해버렸다.

시간마저 그렇게 배분되고 있다.


장비, 탱크, 그런 류의 사람으로 불리곤했다.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다 태워버려도 좋을 만큼

어떻게든 밀고 끌고 나아가려 힘을 쓰곤 했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일을 했고,

치열한 과정이, 함께한 사람들이, 보람찬 결과가,

좋았더랬다.


그런데, 오늘은,

가볍게 진동하는 문자 하나에 심장이 두근댔다.


머릿속에 투두리스트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해야할 영어 회의,

공유하기엔 미처 정리 되지 않은 사업기획안,

마감이 다가오고 있는 시작하지 않은 원고,

곧 있을 아빠의 수술을 위해 챙겨야 하는 서류들,

상속세 신고를 위해 발급해야 하는 추가 자료들,

계기판에 정기점검 경고등이 들어온 차,

(아, 맞다. 아빠 차도 기간 내에 폐차를 해야지)

반납해야하는 대출 도서 목록까지 떠올랐다.


이 많은 것들 중 우선순위는 뭐였더라?

이것들을 다 해내면서 일도 할 수 있을까?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힘에 부쳐도 되나?

무엇보다,

지금, 나, 뭘 하던 중이었더라?



우와. 카레, 맛있겠다!


그 소리가 초승달처럼 새초롬 떠올랐다.

그래. 주인공을 캐스팅하려고 했었지.

수수하고 조금은 덤덤한 매력의 아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매력의 아이,

앙칼진 매력의 아이 중 누가 나으려나?


카레 페이스트들을 집었다 놨다 이것마저 바빠졌다.

숨이 가빠오면서, 뜬금없는 눈물이 고였다.

그러다 일순간 멍해졌다.

요즈음 자주 그러하듯이.


아빠의 전화 한 통에,

누군가의 댓글에,

작은 물건 하나에,

갑작스레 눈물이 나다가 멍해지고 마는,

이러한 내가 일을 시작해도 될까?


이 카레를 이틀간에 다 먹어치우는 동생은,

돌아보면, 장례 후 일주일만에 출근을 했다.

돌이켜 보면, 회사에서의 동료들도 그러했다.

어느 순간 핼쑥 나타나 괜찮아요를 연발했다.


괜찮기는, 이것봐, 안 괜찮구만.

몇 달이 지났는데도, 하나도.

그럼에도 어떻게 그렇게 시작했을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새벽에 집을 나섰고, 저녁에 돌아왔을까.


그때는 나 역시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일주일즈음 후엔 돌아오겠지.

그때까지의 업무는 이렇게 처리하고...

돌아오면 적응의 시간을 조금 주고...

이런 불온한 생각들을 했더랬다.


나도 몇년 전에 겪었어.

조금 지나면 나아져.

나도 똑같았잖아.

그 맘 알아.


그런 류의 말들을 건네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던 것 같다.

이제 난,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섣불리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모른다.

내가 겪지 않은 것들을.

100%란 없다.

겪어 내고도

나의 것과 그의 것이 같지 않기에.

아직은 모른 채로 두기로 한다.

다만 함께 걸음을 맞춰보려 할뿐.

0%라 해도 곁에 있을 수는 있겠지.


나의 시작도 일단은 모른 채로 두기로 한다.

준비되지 않은 내게도 곁을 주기로 한다.

그 속도에 발걸음을 맞춰보기로 한다.


새벽에 사라졌다 저녁에 나타난 동생의 신발이

언제나처럼 현관에 바르게도 놓여있었다.

괜스레 휘적여 다시 정갈하게 정리해본다.


그리고는 눌어붙을세라 카레솥을 휘저으러 간다.



SSO.






- 유산소 명소 @ 롯데월드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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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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