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4일만의 출근길은 1594보만 걷기로 해

by 쏘다님


1,594일 만에 출근을 했다, 아니, 출근 흉내를 냈다.


이렇게나 오래 걸릴 줄 몰랐다. 그저 몇 달, 길어진다 해도 한두해 정도 예상했기에, 화이트 셔츠도, 진주 귀걸이도, 핑키펑키 립글로스도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 방치된 외출용 아이템들이 이젠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한참을 찾았다.


비록 사용 기한이 지났을지라도, 먹는 것도 아닌데 어떠랴? 거울 앞에 앉아 오래된 화장품으로 얼굴도 칠해본다. '아직도 이렇게 화장 해?' 류의 유튜브 영상, 비포 모습이다. 화장법처럼 일하는 법도 잊어버렸으면 어쩌지?


항암 환자의 간병인이란, 5분 대기조도 실격이다. 5초 정도는 되어야 한다. 엄마와 동고동락했던 4년여의 시간들은 매초가 아쉬웠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 속에 화장 같은 것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 시간들은 치열한 용광로였고, 다급한 메트로놈이었으며, 빽빽한 은하였다. 그러다 일순간, 태양이 사라졌다. 용광로는 식었고, 메트로놈은 멈췄다. 사물을 구분할 빛도, 자전을 할 힘도 사라졌다. 이후로는 광활하고, 깜깜하고, 조용한 우주를 부유할 뿐이었다.


어디선가 미약하게 중력의 힘이 느껴졌다. "이것부터 시작해보자". 그렇게, 끌어당겨졌다. 이렇게, 거울 앞에 어색한 얼굴로 앉게 되었다. 비록 재택근무라 하여도 화상 회의를 위해서 예의를 갖추려는 노력은 그 미약한 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낯설다. 결국, 다시 세수를 했다. 옆으로 보이는 샤워부스 안에는, 엄마의 쇠약해진 다리 근육을 위한 목욕 의자가 아직 자리하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 개발 프로세스와 견적을 논의할 수 있을까?


의식으로서의 출근길이 필요했다. 일도 돌봄도 할 수 없는 공간에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진짜 출근'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걸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가 커피숍에서 커피도 테이크 아웃했다. 하지만 그들을 따라 지하철 입구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약속한 미팅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하나?

커피숍에서 꼴사납게 화상 회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불안을 반영한 짐의 개수만큼 무거워진 '집 나온 사람' 같은 빅백을 다시 챙겨들고, 커피가 든 텀블러의 외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질 만큼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일부러 보지 않기로 한다. 신발장 속 엄마의 운동화, 엄마가 곱게도 앉아 있던 소파, 엄마의 콧노래와 함께 작동을 시작했던 커피포트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왔다. 거울 앞에 앉아 다시 핑키펑키 립글로스를 바르고, 노트북을 켜서 화상 회의 창을 열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약속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싫었다. 차가워진 텀블러를 오래 들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니 가슴이 쿵쾅대는 건 걸어왔기 때문이라고 하자.


갑작스레 명랑한 인삿말이 들려왔다. 20년 넘게 훈련된 얼굴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왔다. 그보다 더 반갑고 살갑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바로 일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으련만, 처음 만난 사이는 그럴 수 없었다. 맞다. 그런 사회적 합의가 있었더랬지. 특히 세련되고 친절한 영국 신사에겐 더욱.


그는 영국인 특유의 발음으로 세심하게 이런 저런 일상을 물어왔다. 그 질문들은, 굴러오던 볼이 유유히 골인하는 것 마냥, 엄마의 이야기로 가서 닿았다. 골대 앞에 서서 막아야 했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가버려 발을 뻗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더럭 눈물이 솟구쳤다.

억지로 누르려하는 노력은 더 부추길 뿐이다. 그냥 울었다. 아이스브레이킹을 하려다 마음이 깨져버린, 그런 나의 모습을, 화면 속 중년의 신사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다시 바라볼 수 있을까?


“Take your time. As much as you need, honey.”


차마 마주하지 못했던, 화면 속 신사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암으로 인해 돌아가셨다고. 자신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1년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그러니, 천천히, 얼마든지, 시간을 가지라고. 그의 눈에도 나와 비슷한 것이 슬쩍 비쳤다.


그의 배려로 굳었던 머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건 회의는 끝났다. 회의는 정리되었지만, 감정은 정리되지 않았다.


이게 다시 출근을 하는 사람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은

세상 쪽으로 몇 걸음 움직였다.


1,594일 만의 출근길은

1,594보면 됐다.

나는 아직 설익었고,

오늘은 이만큼이면 충분하다.



SSO.



# epilogue.

걸음 수는 강박적으로 맞출 수 있었지만,

글자 수 맞추기란 좀처럼 줄이기 어려워,

글자 수 > 걸음 수, 한 번만 봐주십쇼.

그럼, 다음엔, 다시,

WORK HARD, WALK HARDER.






- 커피 테이크아웃 @ 스타벅스 (송파 어딘가)

- 화상 회의 @ 내 방


- 글자수 : 2153자

- 걸음수 : 1594보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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