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kg뺐다는데, 걷는 건 살 안빠져, 말해야만 했냐?

by 쏘다님


몸무게가 세 자리를 찍었다.


충격적인가? 당사자인 2년 전의 나는 오죽했으랴? 창피하지는 않냐고?


"장례식 땐, 딱 두 사람만 연락하면 돼."


의미없는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 소박하고도 단호한 우리 엄마는 마지막 정리까지 그렇게 깔끔하셨다. 그 두 사람 중 한 분은 국내 최장수 드라마를 최장 기간 집필했던 작가셨더랬다. 유치원 때부터 가족들이 이웃처럼 지내왔기에, 나에겐 그저 푸근한 동네 아줌마일 뿐이었지만. 엄마의 팥빙수를 유독 좋아했고, 안아줄 때면 글쓰기의 몸살로 파스 냄새가 나던.


새로 집필한 드라마가 방영을 시작할 때면, 첫 화를 보고 엔딩곡이 흐를 즈음 전화를 하는 암묵적인 규칙 같은 것이 있었다. 전화기 너머 들리는 멜로디를 확인하며 의리의 본방 사수를 증명하려는 듯.


"아줌마, 잘 봤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어휴, 야. 사람들이 칼 들고 내려치려는 도마 위에 올라가서 깨벗고 춤추는 것 같아. 얼굴이 다 화끈거려."

그렇게 말하곤 하셨다.


작품 공개 뒤 대가의 모습도 그러할 진대, 일천한 끄적임으로 내밀한 마음의 속살을 다 까보이고 있는 지금 나의 각오는 어지간한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몸무게 공개쯤이야, 괜찮다.


물론 장점도 있었다. '무게는 곧 힘이다' 물리 제 1법칙은, 간병 생활 동안 엄마가 화장실을 가고 싶어하실 때 몸을 번쩍 일으켜 드릴 수 있었고, 입원할 때면 온갖 짐을 잘도 옮길 수 있었다.


장점으로 포장해 보려 해도, 일을 그만두고 간병에 집중하는 동안,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쁜 습관을 방치한 건 어디까지나 나의 과오였다. 엄마는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란 말로 그마저 당신의 책임으로 안아버렸다.


엄마에게 그런 무게까지 더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쁜 습관을 하나씩 덜어내고 좋은 습관들을 하나씩 더하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걷기였다. 그 때문인지 15kg이 빠졌다. (그러니, 진짜 괜찮다.)


그런 얘기에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걷기는 살 안 빠져, 비효율적이야.'로 화답했다. 근래 만난 다정한 이들의 '어쩜 이렇게 야위어서 나타나셨어요?' 라던가, '팀장님이 너무 예뻐져서 저도 자극 받았어요.' 같은 (문자 그대로)몸둘 바를 모르겠는 칭찬-주변 타인들의 시선은 '저게 야윈 거래?' 였다 하여도-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적어도, 걷기의 효율성을 논하고 싶지는 않았다.


식사 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검색했다. 그러자, 마침 익숙한 숫자가 나타났다.


걷자.

15kg를 감량했으니, 15km를.

이상하고도 강박적으로 기념하자.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과학적이고도 실체적으로 검증해주겠다.

언젠가는 30kg를 감량하고 30km를 걷게 될지도(아, 너무 멀다!)...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집까지의 거리를 나타낸 '15'라는 숫자에 생각이 순식간에 달려나갔다. 이런 식이라도 힘이 나는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걸었다.

일단, 추웠다.


거세게 불어오는 겨울 바람으로 몸이 떨렸고, 머릿속 소용돌이치는 차가운 말로 마음이 흔들렸다. 어떤 이가 책의 제목으로 내건 '납작한 말들'이란 표현이 이해됐다. 어떤 말은 듣는 이를 바닥으로 납작하게 만들어버린다. 몸과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발 마저 무거워져 버스 정류장 의자에 쉬었다 가기로 했다. 의자는 따뜻했다. 식어버리고 무거워진 나를 따뜻한 온기로 데워주고 든든히 받쳐주었다. 아,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그러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내 동생.


IT 종사자답게 이성적이고, 비효율적 행위는 과감히 삭제하며, 간지러운 말들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러나 작은 것들도 놓치지 않는 세심한 시선으로 무심한 척 티내지 않고 살뜰하게 챙기는, 모순적인 아이. 그 아이가 며칠 전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누나, 생일 선물 줄까? 여기서 하나 골라봐."


일주일이나 지난 생일 선물을 그제서야 챙겨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빠는 밖이 이렇게 추운지 모르신다. 더불어 엄마가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계신다. 엄마의 입원 생활이 한 달이 넘어가자, 호스피스로 병동 이동을 권유 받았다. 그곳에서 마저 여명기 선언을 들을 때즈음, 혼자 계시던 아빠는 쓰러지셨다. 중환자실을 거쳐 수술실, 회복실, 일반병동, 그리고 요양병원으로 정신없이 옮겨다니시던 탓에 틈이 없기도 했지만, 쇠약해진 아빠에게 차마 전할 수 없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엄마는 어때?' 묻지 않고, '엄마는 이래요'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통곡하는 소리를 멀리서 들으신 후 부터 인 것 같다. '아빠는 아직 모르신다고 믿고 싶은 나'와 '모르길 바라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는 아빠'는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도 이렇게 해드리면, 좋아했어."


그러한 '척'은 결국 들통나기 마련이다. 주말이면 나와 동생은 아빠를 만나러 병원을 찾는다. 그때마다 특별 요청 아이템, 간식 거리, 취미 용품 등을 야무지게 챙긴다. 그 날 역시, 일껏 이것 저것 들고와서는 아빠의 침상을 꾸며드리던 중이었다. 그러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차가운 사실, 납작한 말, 과거형의 엄마.


나는 놓쳤지만, 동생은 발견했다. 아빠의 손이 자꾸 눈 쪽으로 향한다는 것을. 나는 세심하게 챙겨온 아빠의 물건들을 세팅하는 데에 집중했지만, 동생은 아빠의 적어진 말수를 무심하게 주목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때의 나의 말이, 이후의 아빠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그제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등이 서늘했다. 피부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고, 입은 얼어 붙었다. 머릿속은 진공 상태가 되어, 한동안 어떻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골라봐."


검은 상념 속을 떠다니고 있던 나를, 동생은 그렇게 단단히 잡아 내렸다. 굳이 모니터 앞에 앉히고, 과일 이름을 딴 귀여운 이름의 쇼핑몰 창을 열어 분위기를 환기시켜주었다. 전부터 갖고 싶어하던 토스터기를 눈여겨 보았다가, 찾아내어, 결제해주었다.


"누나, 택배 왔어."


어떤 말들은 무심하지만 세심하다. 어떤 말들은 세심하지만 무심하다. 그 세심한 배려가 주방 한켠에 예쁘게 자리했다.


따뜻해진 엉덩이를 느끼며, 우리집 주방에 있는 예쁜 토스터기를 생각했다. AOP 버터가 들어간 크루아상 생지를 사야지. 그것으로 동생이 그리워하는 엄마 냄새-1화 '프루스트식 작별을 하려고 빵을 샀어' 참고-를 집안 가득 채워야지. 아빠가 좋아하시는 떡갈비도 굽고, 부탁했던 운동화도 챙겨야지. 그리고 내일 아빠를 보러 가야지.


초록색 앱을 열어 면회를 예약하고, 보라색 앱을 열어 재료를 주문하고, 다시 일어났다. 엉덩이에 남은 의자의 온기를 아빠에게 고스란히 전해 드리리라. 걸음이 빨라졌다.


쉬지 않고 걸어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체중계에 올라갔다.

그럼 그렇지. 아침에 쟀던 체중보다 0.7kg가... 늘었다(엥?).


그 자의, 아니, 그 분의 말이 맞았다니. 이건 분명, 근육탓이다. 오래 걸었으니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활성화되었을테고, 근육 중 하체 근육은 비중이 크며, 체지방보다 근육의 무게는 무거우니까... 에잇! 변명을 말자. 비루하다.


걷는 동안, 몇 가지는 덜어지고, 몇 가지는 더해졌다.

그 감정들에 이름을 붙이기엔 아직 이른 종류의 것들이었다.

다만, 후자의 무게라면, 다시 세 자리가 되어도 좋다, 생각했다.


덕분에, 다이어트 생각에 내내 외면해왔던, (얼마전 사랑스러운 지인이 생일 선물로 보내온) 사랑스러운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꺼냈다.



SSO.




# epilogue.

인바디를 재어보니, 근육량이 0.9kg 더해졌다. 그럼 그렇지!






- @ 판교 어딘가 ~ 송파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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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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